[한마 아고라] ‘꿈의 적바림’
[한마 아고라] ‘꿈의 적바림’
  • 언론출판원
  • 승인 2020.04.13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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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쨌든 그때 나는 그 꿈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세 번째 나에게로 찾아온 꿈은 다소 희미했던 첫 번째 꿈과는 달리 묘한 색감을 띤 테두리를 두른 입체감을 지니고 있었다.

  꿈에 상서로운 기운에 젖어 계속 손사랫짓을 하게 됐다. 분명 몇 킬로미터쯤 떨어져 있던 도시의 풍경일 텐데, 구태여 길게 손을 뻗지 않아도 평소의 내 손만으로 쓱 헛손질을 하면 절기하게도 그 ‘풍경자체’가 만져졌다. 나는 지워지려야 지워지지도 않는 그 흉흉한 촉감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 기억은 하고 있되 당최 비슷한 걸 끌어다 시늉을 내 볼 생념도 품지 못했다.

  그저 그만이다. 그저 그만이다. ‘여기는 또 어디보다 사뭇 좋구나!’라며 자족이라는 꽤 그럴듯한 포기에 다가서려할 때, 꿈은 설핏한 햇빛이 고즈넉한 그 방을 조명한다. 누워있던 ‘실재’의 나는 그제야 깨어났다. 나는 몇 번째 되뇌는지 모를 말을 등받이에 기대 읊조렸다. ‘난 꿈속을 낭랑(浪浪)하는 나를 만났지만 결코 내가 아니었지. 거기에 진즉부터 살고 있는 몽민(夢民)이었어.’ 이제야 무엇이든 상관은 없고. 어물쩍대며 넘어갈 요량이었는데 불현듯 꿈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어졌다. 당신에게만.

  늘 꿈을 꾸지만, 이 꿈은 예외 없이 회색빛인데 묘하게 감청으로 희끄무레한 셀로판지를 덧씌운 것 같은 사거리에서 시작한다. 사거리는 나의 생각일 뿐 정작 사거리가 아닌 삼거리이거나 오거리인지도 모른다. 나는 등 뒤를 밑도 끝도 없이 의심하며 걷고 있었다. 사람이라고는 전혀 살지 않을 것 같은 여염집들이 좌우로 즐비하게 이어 선다. 분명 문은 문이라고 달려있는 것들은 노상 보아오던 것들과의 괴리감으로 이지러져 덜컥 생각 없이 당기면 뭔가 얄궂은 게 튀어나올 것 같았다.

  꿈인지 생시인지 어느 정도 구분은 가능했다만, 거리에는 정말이지 아무도 없었다. 만약 지평선이 보였다면 그 끝까지 걷는다는 심정으로 걸어도, 걸었음에도. ‘나’는 제3자의 입장으로 나마저도 여기 이 자리에 없는 것 같았다. 어린아이가 남몰래 영사실에 들어와 호기심에 롤필름을 좌르륵 뽑아대듯, 영사실의 부연 형광등빛을 가까스로 걸러낸 네거티브필름이 몇 십 년 후에나 완성될 아이의 이목구비 위로 상영되는 형상이다.

  필름의 내용이 진면목인데 그 아이에게는 의미가 절대 와 닿지 못한다. 또 쉽사리 닿을 것 같지도 않았다. 아이의 눈에는 그냥 누군가가 똑같아 보이는 사진을 여럿 이어 붙여놨을 뿐인데 어떤 건 끊어졌다가 갑자기 생경한 컷으로 넘어갔다. 제칠 뇌신경, 그러니까 내 얼굴신경에 문제가 생겨 한쪽은 웃고 한쪽은 화가 몹시 난 듯 일그러져다.

  남의 귀에 주제도 없이 사방팔방 떠지껄이는 소리도 귀착점은 오로지 하나다. 난 제삼자와 마찬가지로 스스로를 객관적 대상으로 볼 기회를 얻은 것이다. 게다가 이 ‘세상’에서 나를 유린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나다. 쓸데없는 자만에 빠지기 쉬운 그런 나이기에 더더욱 가만한 채로 다니고자 했다. 나의 눈에 익숙하나 자주 오른 적은 없는 산이 불쑥 생겨났다. 뒷머리에 눈이 없는 내가 앞을 보는 중에도 뒤통수의 서슬은 등등했다. 고개를 돌리지 않고도 산이 있고 산중허리에 또 다른 마을이 들어서있겠구나 확신에 가까운 어림짐작을 하였다. 딱히 종교도 없는 나는 신의 전능인 듯 이 꿈의 장소를 절감하였다.

  번뜩번뜩 꽤 꿈다운 장면들이 스쳐지나갔는데 일일이 열거하기 어렵다. 아예 생각이 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편할지 모른다. 중간에 잠깐 목을 축였다. 내가 깨어나서 목을 축인 건지, 꿈속의 나와 같은 사람인 입술만 적시라고 준 수통을 뺏어 벌컥벌컥 입에다 들이부은 건지는 모르겠다. 목이 몹시도 개운했다.

  새벽녘에야 간신히 잠이 드는 습성의 나다. 이 날은 신명이 양팔을 잡아당기듯 유연하게 깨어났다. 베갯잇이 조금 젖어 지퍼를 열고 벗겨내 세탁바구니 던져 넣고는 갈증이 일어 물을 따라 마셨다. 그 후로 나는 꿈에서 ‘나’를 만난 적이 없다. ‘나’는 유몽민(遊夢民)으로 살아갈 것이고 ‘우린’ 조촐하지만 제법 멋지게 재회할 것이다.

명성희(경찰학과 졸업 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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