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지역 인물-‘꽃대궐’의 주인공 동원 이원수(冬原 李元壽. 1911~1981)
이달의 지역 인물-‘꽃대궐’의 주인공 동원 이원수(冬原 李元壽. 1911~1981)
  • 언론출판원
  • 승인 2018.04.09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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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민족의 노래로 널리 애창되고 있는 ‘고향의 봄’ 앞부분이다. 이 노래의 노랫말을 지은 사람은 아동문학가 동원 이원수 선생이다. 1911년에 태어난 선생은 일제강점기, 6·25전쟁과 분단 시대라는 현대사의 굴곡진 시대를 살다 갔다. 그의 작품에 시대의 아픔들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의 작품은 어느 시대 할 것 없이 한국 아동 문학의 발전에 뚜렷한 발자국을 남겼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25년 『어린이』지에 동시 <고향의 봄>을 발표하면서 아동문학 창작 활동을 시작한 그는 <겨울 물오리>, <때 묻은 눈이 눈물지을 때>를 마지막으로 남기고 1981년에 작고했다. 그 56년 동안 그는 동시와 동화, 소년 소설, 아동 극본, 평론에 이르기까지 1천여 편에 이르는 방대한 작품을 남겼다.

  굴곡진 시대를 살았던 아동문학가

  선생은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가난이라는 것을 몸소 겪은 사람이다. 일제강점기 때는 사상범으로 지목되어 옥고를 치렀다. 6·25 전쟁 때는 두 자식을 잃었을 뿐 아니라, 북한에 부역했다는 이유로 ‘빨갱이’ 의혹까지 받았다. 그의 사후인 2002년에는 일제강점기 말기에 발표한 5편의 친일 작품이 도마에 올라 『친일인명사전』(민족문제연구소, 2009년)에 이름을 올리는 아픔까지 더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그의 생애는 결코 평탄한 것이었다고 할 수가 없다.
동원 선생은 1911년 11월에 경남 양산에서 태어났으나, 생후 10개월 만인 1912년 9월에 창원 중동리로 이사 와서 살았다. 인근 소답리에 있던 서당에 다니며 어린 시절을 보냈으니 ‘창원 사람’이라 해도 잘못이 없다. 그는 <흘러가는 세월 속에> (1980년)라는 글에서 창원 소답리의 아름다운 봄 풍경을 직접 언급하기도 했다. 그 소답리와 주변 일대의 풍경이 ‘고향의 봄’ 배경이 되었음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선생이 이 노랫말을 짓던 때는 마산으로 이사를 간 뒤였으니, 타향 마산에서 고향을 그리워한 노래가 ‘고향의 봄’이었던 셈이다.
선생이 마산 오동동으로 이사를 간 것은 11세이던 1922년이었다. 그곳에서 마산공립보통학교(지금의 성호초등학교)를 다니면서 학생 문화 운동 단체인 ‘마산신화소년회’를 만들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당시 대표적인 아동문학가 방정환 선생을 만나게 된다. 학급 신문에 일본인을 비방하는 글을 써서 ‘행동 발달 사항’에 해당하는 ‘조행(操行)’ 점수가 깎이는 등 선생은 불의에 항거하는 정신이 어릴 적부터 싹터 있었다.
  마산공립보통학교에 이어 20세에 마산공립상업학교(지금의 마산용마고등학교)를 졸업한 선생은 함안금융조합에 취직을 하게 되는데, 뒷날(1942년과 1943년) 이 조합에서 발행하는 『반도의 빛』이라는 잡지에 친일 작품 5편을 발표하여 일생에 오점을 남기게 된다. 이보다 앞선 1935년(24세)에 반일 문학 그룹 ‘독서회’를 조직하여 활동하다 일경에 잡혀 옥고를 치른 이가 동원 선생이다. 이런 선생이 친일 작품을 발표했다는 것은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지만, 특히 가족들이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을 것이다.
“최근 금융조합 기관지에 친일의 글을 쓰신 것이 밝혀져 우리 유족은 너무나 놀라고 충격을 받았다. 독서회 사건으로 형을 살았고 석방된 후 불온사상 요주의 인물로 일 년간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고생하던 때 상사의 도움으로 금융조합에 복직했던 아버지는 알게 모르게 얼마나 압박을 받으셨을까? 짐작할 뿐이다. 해방의 기쁨을 노래하고 기뻐하시던 아버지, 보이지 않는 감시의 눈길을 의식하면서도 아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항일 정신을 심어 주시던 분이 자원해서 쓰셨다고는 믿을 수가 없다. 문제의 친일 글 속에도 ‘나는 지금 어쩔 수 없이 이 글을 쓰고 있다.’는 비밀의 코드가 숨어 있을 것만 같다.”

  위의 글은 선생의 장남이자 역시 아동문학가인 이경화 선생이 <불행했던 나의 아버지 이원수>라는 글의 마지막 부분이다. 오죽 충격이 컸으면 “‘나는 지금 어쩔 수 없이 이 글을 쓰고 있다.’는 비밀의 코드가 숨어 있을 것만 같다.”라는 표현을 했을까 싶다. 대한민국의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을 적용, 조사하여 2006년∼2009년에 걸쳐 공식 발표한 일제 강점기의 ‘친일 반민족 행위자’ 명단에는 선생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의 친일 행적에 대한 새로운 연구가 나오길 기대할 뿐이다.

  약자·시대의 아픔 외면하지 않은 삶

  민족의식에 눈을 뜨게 한 마산 시절을 거쳐, 식민지 가난과 아동의 삶을 노래했던 일제강점기 선생의 작품은, 고난에 찬 민족 현실 한가운데에 놓인 어린이들의 삶의 고통을 어루만져 주는 그런 것이 많았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1929년에 발표한 <헌 모자>이다.

  학교 마루 구석에 / 헌 모자 하나. / 날마다 혼자 남는 / 헌 모자 하나. // 학교 애들 다 가고 / 해질녘이면 / 가고 없는 주인이 / 그리웁겠지. // 월사금이 늦어서 / 꾸중을 듣고 / 이 모자 쓰지도 않고 / 나간 그 동무,// 지금은 어디 가서 / 무얼 하는지 / 보름이 지나도록 / 아니 옵니다.

  해방 공간 선생의 작품은 ‘새 나라 건설’이라는 과제와 관련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동시로서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동화나 소년 소설 쓰기를 겸하게 된다. 이 시기에 가장 주목을 받은 작품이 <숲속 나라>(1949년, 『어린이 나라』)라는 장편 동화이다. 이 작품은 이상적 인간 사회를 어린이의 마음과 삶의 세계에서 찾고 싶어한 판타지 형식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1950년대 선생의 작품에는 전쟁이나 죽음과 관련된 것이 많다. 그도 그럴 것이 6·25라는 동족상잔의 전쟁을 치른 이 땅의 비극을 그가 외면했을 리 없기 때문이다. 그에게 전쟁은 고아, 굶주림, 이별 등 온갖 고통의 원인이었으며, 세상에서 부정되어야 할 모든 것들의 집합체일 수밖에 없었다. 동화 <꼬마 옥이>는 이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의 하나다.
1960년에 겪은 4·19 혁명은 그의 의식을 민주주의의 소중함, 독재 정권에 대한 저항이라는 새로운 방향으로 키우는 데 큰 몫을 담당하였다. 이후 한국 사회의 산업화와 경제 발전으로 인한 부의 불균등 현상이나 군부 독재정권의 집권 연장에 강한 저항 의식도 이 시기에 찾을 수 있다. 대부분의 아동문학가들과는 달리, 선생은 현실을 수용하면서 어린이 스스로 현실을 이겨낼 수 있는 상상력을 주는 것으로써 민족 문학, 서민 문학, 현실주의 문학을 이끌어 나갔던 것이다. 마산에서 일어난 3·15 의거를 <어느 마산 소녀의 이야기>라는 동화로 살려냈으며, 4·19 혁명은 <벚꽃과 돌멩이>로, 그리고 혁명 후에 이어가야 할 정신의 계승은 <땅 속의 귀>라는 동화로 들려준 것도 이 시기였다.
이른바 산업화 시대가 도래하던 1970년대 이후의 작품에서는 노동 문제, 소외된 아동에 대한 따뜻한 눈길이 감지된다. 1970년에 발표한 <불새의 춤>은 악덕 기업주에 대한 고발과 노동자의 아픔을 나타내고자 한 단편 동화이다. 이것은 1970년 11월 13일 청계천 봉제 공장 노동자 전태일이 노동자의 인권과 주권을 찾으려고 처절하게 몸부림치다 분신한 사건을 보도한 몇 줄의 기사가 발단이 되었다고 한다.
  1936년 25세 되던 해에, 동시 <오빠 생각>으로 유명하던 최순애와 결혼하여 마산에서 달콤한 신혼 생활을 하면서도 생활고를 동시에 겪어야 했던 동원. 앞에서 소개한 작품 이외에, 동시 <종달새>(1945년), 6·25 이후 양민 학살 사건, 4·19혁명을 다룬 장편소설 <민들레의 노래>(1964년), 6·25전쟁의 아픔을 담은 장편 동화 <메아리 소년> (1968년), 독재 정권을 비판한 동화 <명월산 너구리>(1969년) 등 주옥같은 작품을 남겼고, 생활고로 말미암아 양산·창원·진영·마산·함안·서울 등지로 수도 없이 이사를 했던 사람이 동원이다.
  비록 동시·동화 등 어린이와 관련되는 형식을 빌렸지만, 이처럼 그는 시대의 아픔을 외면한 적이 없는 올곧은 문학가였다. 그렇기에 그의 친일 행위는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수수께끼와 같은 것이 아닐 수 없다. 사후에는 그를 기리는 일련의 일들이 지역사회에서 착착 진행되었다. 특히, 2001년 7월에는 ‘고향의 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가 구성(2003년 12월에 ‘고향의 봄 기념 사업회’로 재발족)되어 2002년 11월에 ‘고향의 봄 도서관’ 개관을 이끄는 한편, 2003년 12월에 그 내부에 ‘이원수 문학관’ 공간을 확보한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마산 산호공원과 창원 용지공원에 ‘고향의 봄’ 노래비가 세워졌고, ‘이원수 도로’가 지정(2003년)되었으며, 창원 소답동에 ‘이원수 선생 살던 곳’ 표지석도 건립되었다(2004년). 탄생 100주년이 되던 2011년도에는 이원수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 선포식 및 흉상 제막식을 문학관에서 가졌고, 전국 어린이 고향의 봄 잔치 및 이원수 탄생 100주년기념학술세미나도 성공리에 개최하였다. 이후 지금까지 다양한 기념사업이 지속되고 있고, 그의 ‘고향의 봄’은 창작 가족 뮤지컬, 칸타타와 같은 중요한 문화콘텐츠로 자리매김하고 있기도 하다.
  시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짊어지고 나갔던 그였지만, <고향의 봄>을 통해 그는 여전히 모든 이들 가슴속에 영원한 향수와 그리움을 선사하고 있다.

[자료 제공: 이원수 문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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