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의 추억
네팔의 추억
  • 언론출판원
  • 승인 2018.04.09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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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우리 대학 한마 의료 봉사단이 네팔에서 해외 의료 봉사를 하고 있다.', '아이는 치료가 무서운 듯 울음을 터뜨렸다.', '네팔 아이의 모습'
(왼쪽부터)'우리 대학 한마 의료 봉사단이 네팔에서 해외 의료 봉사를 하고 있다.', '아이는 치료가 무서운 듯 울음을 터뜨렸다.', '네팔 아이의 모습'

 

  초등학생 시절이었다. 분교이던 우리 학교에 외국인들이 의료 봉사를 왔다. 그들은 여태껏 내가 가까이서 보지 못했던 코가 크고 눈이 부리부리한 서양인이었고, 무서워서 가까이 가기도 힘든 흑인들도 있었다. 미군들이 의료 오지였던 우리 학교에 의료 봉사를 왔던 것이었다.

  나는 종일 그들의 주위를 맴돌며 생전 처음 보는 낯선 기구들과 마냥 신기하기만 한 그들의 언어에 귀 기울이곤 했다. 좀 더 솔직히 얘기하면 그들의 주위에 어슬렁거리면 가끔 내게 웃으며 다가와 주머니에서 꺼내 주는 초콜릿에 관심이 더 있었다. 말로만 들어 보았던 그것은 내가 여태껏 먹어 본 그 어떤 음식보다 부드럽고 달콤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미군들이 학교 운동장에서 공짜로 약을 준다는 소문은 우리 마을뿐만 아니라 옆 동네를 지나 멀리 있는 마을까지 퍼졌고, 농사일을 하던 바쁜 일손들과 걷기가 힘들어 다리를 끌고 다니던 달식이네 할아버지까지 줄을 서서 기다리게 하는 풍경을 그렸다. 병석이네 아버지는 학교 앞까지 잘 걸어오다가 기다리는 사람들 앞에 쓰러져 응급 처치를 받고 미소 지으며 돌아가시던 모습은 지금도 묘한 웃음을 짓게 한다.

  반세기의 세월이 흐른 뒤 그 미군들의 자리에 내가 서 있음을 알았다. 그때의 기억과 지금의 내가 오버랩되어 새로운 무대에 선 주인공이 된 것이다.

  네팔, 그곳은 낯선 땅도 낯선 사람도 아닌 내가 어릴 적부터 살고 있던 곳이었다. 거기엔 나의 모습과 어릴 적 친구들이 살고 있는 과거의 나의 나라였다. 거기에는 달식이네 할아버지도 보였고, 병석이네 아버지도 계셨다. 그리고 초콜릿을 기대하며 끊임없이 주위를 맴돌던 나도 거기에 있었다.

  3년째 네팔 Hetauda에서 봉사를 하였다. 30년도 더 되었을 차들이 내뿜는 시커먼 매연과 함께 한 치 앞을 분간하기 힘든 희뿌연 먼지를 흩날리며 줄지어 차들이 달리는 도로를 따라 200여 km의 거리를 무려 11시간이나 걸려 1960년대 우리나라의 어느 가난한 도시 풍경을 닮은 듯한 목적지에 도착하여 낡고 오래된 호텔에서 멀고도 긴 여행의 피로를 풀었다.

  한동안 편리한 현대 문명에 물들어 있던 나에게 네팔은 생활 자체가 힘들게 느껴지는 나라였다. 하지만 그들의 삶을 가까이서 보고 상처를 치료하면서 문명의 이기에 내가 얼마나 오만해져 있었던가를 깨닫게 되었다. 운동화는 고사하고 슬리퍼조차도 살 형편이 되지 않는 그들은 맨발로 다니므로 인해 발을 내디딜 때의 충격이 고스란히 무릎으로 전해져 젊은 나이부터 무릎 관절염이 생기고, 또한 허리 통증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영하까지 내려가는 겨울 추위에 난방도 없을뿐더러 피부 로션 한 번 발라 본 적 없는 어린 아기들의 볼과 손은 트고 각질이 져 있었다. 나도 어릴 때 저랬으리라 생각하니 그들은 낯선 이가 아니라 바로 나였으며, 나의 이웃들이었다.

  문화 혜택은 고사하고 의료 혜택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그들은 우리 봉사팀이 갈 때마다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돈과 의료 시설이 없어 사소한 질병이 악화되어 우리 봉사팀의 치료 한계를 넘는 환자를 접하면 안타깝고 아쉽기 그지없었다. 특히, 준비한 약품이 부족할 때는 주위의 도움을 구하는 노력이 더 필요했음을 느끼게 하였다. 하지만 우리의 치료를 통해 새 희망을 찾는 이들을 볼 때는 뿌듯한 자부심을 느끼기도 하였다. 뇌졸중으로 인해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이에게 적절한 체중 이동 방법을 가르쳐 주어 정상 측을 활용하여 혼자서 걸을 수 있게 된 환자는 치료 교육의 효과를 제대로 경험하는 것 같아 뿌듯했고, 귀가 들리지 않는다고 찾아온 노인에게 귀에 꽉 찬 귀지를 꺼내어 귀가 들리게 한 경우는 봉사에서 웃음을 선사하는 에피소드이기도 했다. 양측 무릎이 퉁퉁 부어오른 환자에게 전기 치료와 마사지를 해주고 파스만 붙여 주었는데 이튿날 부종이 완전히 제거되어 오는 경우는 우리나라에서 별로 경험하지 못하는 치료 효과여서 의료의 질적 수준이 아주 높은 것처럼 착각하게 하기도 하였다. 아마도 평소에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해서 얻는 그들에게 주어지는 특전이지 않을까 싶었다.

  이렇듯 의료 봉사 일정의 하루하루는 안타까움과 웃음 그리고 자부심의 반복으로 햇살과 어둠이 언제 왔다 가는지도 모르게 흘러갔다.

  자연과 더불어 현대 문물의 혜택을 입지 못하는 네팔에서의 우리 의료 봉사팀의 역할은 과거 순수했던 우리나라의 삶을 되돌아보는 소중한 추억인 동시에 학생들에게는 개인적으로 혼자서는 경험하기 어려운 또 다른 행복이라 여겨졌다. 그래서 학교에서 이 봉사 활동 프로그램이 지속 가능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였으며, 매일 봉사 활동을 끝내고 잠자리에 들 때 누군가를 위해 하루를 보냈다는 것은 내가 살아 있음을 느끼는 또 다른 선물이라 느껴졌다.

  봉사를 마치고 봉사 장소를 빌려준 학교를 떠나던 날, 그 학교의 학생들을 향해 인사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한국도 불과 몇십 년 전 여러분들과 같은 모습으로 생활했으며, 이후 여러분들을 도와줄 수 있을 만큼 이렇게 잘 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살 수 있는 방법은 열심히 공부하고 성실하게 사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자라서 성인이 되었을 때 여러분들의 도움이 필요한 나라에 가서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길 바랍니다”.라고 말하며 그들에게 진심으로 그런 날이 올 수 있기를 바랐다.

  봉사 활동을 한 지역의 주변에 위치한 또 다른 도시의 환경을 통해서 바라본 네팔은 산업에 필요한 자원도 지리적 이점도 찾아보기 힘든 현실 속에 있으며, 그들의 경제 발전을 기대하기란 정말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봉사 활동을 한 3년의 세월 동안 그들의 생활 환경도 조금씩 변화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3년 전 밥 먹듯 정전되던 횟수도 줄어들고, 시내엔 오토바이 숫자도 제법 늘어나 보였다. 옷도 화려해졌으며, 주유소마다 불편하게 길게 늘어서 있던 차와 오토바이의 모습도 이제 사라져 조금씩 좋아지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그들의 펴진 주름살과 맑아진 눈동자는 앞으로의 행복을 예감케 하였다.

  그래서 우리가 주고 온 의료 봉사라는 행복의 전염병을 그들이 완전히 흡수하여 또 다른 나라에 전파하는 시간이 곧 오리라 여기며, 네팔의 영원한 안녕과 건강을 기원해 본다.

박돈목(물리치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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