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회 10·18 문학상 현상공모 - 시 '느린 슬픔'
제33회 10·18 문학상 현상공모 - 시 '느린 슬픔'
  • 이아름 기자
  • 승인 2019.11.20 17:5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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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부문 당선작: 이은지(국제무역물류학과·3)

 

느린 슬픔

 

내 슬픔은 항상 늦게 몰려온다.

슬픔의 무게는 내가 당신을 가볍게 대한 만큼

무거워 내 가슴을 짓누른다.

당신의 초상은 내 안의 쏟아지는 슬픔 속 무게를 더한다.

내게 있어 슬픔은

당신의 빈자리 체온이 달아오르지 않는 것

투정 부리는 주름진 손을 거둬버린 것

연약한 당신이 덮고 있는 담요를

다시 덮어주지 못한 것

당신의 약봉지에 몇 알이 더 남아도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것

혼자 먹으라고 준 무화과를 물러터지게 한 것

가는 팔로 혼자 장을 보게 한 것

나는 당신의 초상에서 울지 못했다.

내게서 떠나간 영혼의 온기가 식지 않았기에

이른 초상은 나와 당신의 세월을 정리하기엔

아프도록 짧은 시간이다.

나는 당신을 놔주기까지 오랜 시간을

혼자 무너지고 슬퍼할 것이다.

매년 당신을 추억하며 가슴 앓고

어쩔 때는 열병에 걸려 당신을 부를 것이다.

그렇게 내 안의 당신을 천천히 흘려 보낼 것이다.

당신이 어린 날 붙잡고 놓지 않으려 했던 것처럼

내 슬픔도 당신을 쉽게 놓을 수 없다.

당신과 닮은 손을 보면 눈길을 주고

무화과를 먹으면 당신 미소에 입을 달싹이고

약봉지를 받으면 당신의 앙상한 몸을 가슴에 그릴 것이다.

그것은 언제나 슬픔과 같이 몰려온다.

당신이 내 슬픔 속에 들어와 온종일 머무르는 것 같았다.

당신과 함께한 따듯한 슬픔이었다.

내가 가라앉으면 어깨와 등을 쓸어주고

내가 흘러넘치면 손과 얼굴을 어루만지었다.

당신은 그렇게 한없이 날 지탱하는 사람이다.

나는 초상에서 울지 않았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 곳을 가득 메웠기 때문에

나는 훗날 내 느린 슬픔을 모두 데려와

당신과 나만의 초상을 다시 치를 것이다.

 
10·18문학상 시 심사평
  시는 개별 자아의 내면과 주관적 경험을 통해 표현된다. 이는 자아와 끊임없이 대화하고 숙고의 과정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리고 감정에서 유발된 표현을 통해 자신의 경험을 말하고 존재를 드러내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고 타인과 진실한 관계를 추구하는 사람이면 슬픈 감정이 시를 쓰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올해 접수된 81편의 작품 대부분이 아픔과 슬픔의 연속이었다. 대체로 자신의 슬픈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작품들이 많았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아 절제되지 못한 작품들이 다수를 이루었다. 그중 자신과 사람들의 관계 속 이야기와 감정을 시를 통해 치유하고자 하는 작품들이 눈에 띄었다.
  우선 「자전거」 와 「느린 슬픔」 두 작품을 두고 고심했다. 「자전거」는 마지막 연 ‘결국 인생이란 보조바퀴처럼 곤두박질하며/떼어내는 것이라고’ 등 깨달음을 통해 시적긴장감을 형성했지만 앞선 연들에서 어려운 묘사들이 눈에 밟혔다.
  반면 「느린 슬픔」은 누구나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는 묘사와 자신을 드러내는 담담한 자기 고백을 통해 누군가에게 슬픔을 전달하지만 그 내면에는 슬픔과 애증을 넘어 ‘따뜻함’이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최종으로 당선작을 「느린 슬픔」, 장려를 「자전거」로 선정했다. 끝까지 ‘시’라는 끈을 놓지 말고 정진하길 바란다.

이재성(동문 시인)
 
10·18문학상 시 당선 소감
  당선이 된 걸 보니 심사위원들이 내 슬픔의 표현을 이해하고,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어려운 글을 좋아하지 않는다. 비약적인 은유와 뜬구름 잡는듯한 비유는 읽는 사람들을 피곤하게만 만들 수 있음으로. 무엇보다 내 글을 읽어주길 바라는 소중한 사람이 시에 대해 능통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학 강의를 들으면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글을 어렵게 쓰는 짓은 보험 사기꾼이나 할 법한 행동이라는 최병권 교수님의 말씀이었다. 정말 공감했다. 사랑받고 오래 기억되는 글들은 어려울 수 없다. 우리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말들은 그리 어렵게 포장되어 있지 않고 단순하기에. 시 속에서의 나는 가감 없고, 어떨 때는 처절하기까지 하다.
  겉치레가 없는 내 심연의 모습이 드러난 것이다. 최근 신춘문예의 출품작들을 보면 자신만의 시상에 절인 과열된 수사법으로 읽기 부담스러운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불친절하며, 공감을 일으키지 못한다. 견고한 표현이 아닌 뼈대 없는 구조물에 깃털만 올린 격이라 어딘가 낯선 느낌을 감추지 못한다. 본인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일 뿐인데 왜 글의 몸집을 부풀리는 것에만 혈안이 돼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감정을 누구보다 작은 단위로 섬세하게 표현하는 것이 시인이다. 지나가는 풍경과 작은 추억 그리고 소중한 사람의 몸짓이나 표정에도 천천히 음미하며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시인이다. 사소하고, 무뎌진 것들 또한 잊힌 것들에 새 숨을 불어 넣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시의 본질이기에 여느 때처럼 나는 그것에 충실할 것이다.

이은지(국제무역물류학과·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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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국문 2019-11-27 02:45:32
처음 읽고 계속 생각나서 다시 들어와 읽게 되네요. 진짜 잘쓰셨다 저도 이번에 시 냈는데 당선되신 분은 학생이 아니라 진짜 시인 같네요 소감문도 멋있네요 지나가는 국어국문은 그냥 울지요ㅠ^ㅠ 내년에는 수필에 도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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