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택이란 남자가 불쑥 나타났다. 61세라고 한다. 1979년 특수전사령부 대원 출신이었던 홍 씨는 ‘부마항쟁’ 당시 ‘편의대’로 활동했다고 주장하며 ‘양심선언’을 했다. 홍성택 씨는 지난 15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편의대 활동에 관해 상세히 증언했다.
여기서 편의대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군인이 시민으로 위장해, 시민 사이에 침투해 폭력 사태를 유발하고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등 선동하는 역할을 했다. 군사정권이 만든 ‘간자’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홍 씨의 증언을 통해 이 편의대가 5·18 이전인 부마항쟁 때도 활동했다는 증언이 나온 것이다. 나는 그 인터뷰를 들으며 착잡해졌다. 나 역시 그때 경남대 학생이었다.
홍 씨는 “저는 부마항쟁의 편의대였다. 경남대에서 한 달여 머무는 동안 편의대로 학생들에게 접근하여 대화하다가 11월 3일 데모 이야기가 나오면 따라다니던 형사들에게 말해서 체포해 가도록 했다. 10월 26일(박정희 서거)로 그 일이 끝났지만 지금도 경남대 학생들에게 죄송하다.”고 했다.
홍 씨는 당시 학생 사이에서 활동하는 사복 군인이었다. 그리고 프락치였다. 프락치의 의미는 끄나풀이다.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일하는 사람이다. 당시 학생들은 10월 접어들면서 거대한 먹구름이 시대를 뒤덮는 것을 예감할 수 있었다. 흉흉한 소문이 퍼져나갔다. 수시로 대학 부근 다방에 모였고, 아니면 빈 강의실에서 캠퍼스 곳곳에서 들려오는 소문을 귀 열고 들었다.
홍 씨와 나는 그때 만났는지 모른다. 그의 신호에 얼마나 많고 무고한 학생이 경찰에게 잡혀가 고통을 당했는지 모른다. 그뿐만 아니었다. 같은 목적을 가진 편의대가 대학 곳곳을 누비고 다녔을 것이다. 그들의 손짓에 학우들이 육체와 영혼에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그래도 1979년 10월 18일 우리 대학에서 부마항쟁의 함성이 울렸다. 마산 시민의 함성이 같이 터져 나왔다. 1960년 3월 15일 이후 19년만에 마산의 함성이 독재정권을 향해 분연히 일어섰다. 위수령이 내렸다. 탱크가 교문을 막고, 특전대 군인이 출입을 막았다. 나는 학교에 두고 온 물건이 있다면서 교문으로 진입하려 하다 군인의 곤봉에 머리를 맞았다. 피가 터지지 않았지만 나는 이미 피보다 붉은 분노를 배웠다.
그때 홍성택 씨를 만났다면 그를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다. 벌써 40년 전 일이다. 부마항쟁이 40주년을 맞는다. 우리는 홍성택 씨를 용서해야 한다. 그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야 한다. 부마항쟁 역사에 새로운 탄압의 증거가 밝혀졌다. 부마민주항쟁 기념재단은 밝힌 대로, 홍성택 씨의 양심선언을 증언집에 남겨주길 바란다. 정의도 역사고 악의도 역사다. 용기도 역사다. 감사할 일이다. 용서보다 용기가 더 위대한 일이다.
폴 엘뤼아르(1895~1952)란 프랑스 시인의 시집에 담겨있던 시 ‘자유’가 기억나는 날이다. ‘나의 학습 노트 위에/나의 책상과 나무 위에/모래 위에 눈 위에/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내가 읽은 모든 책장 위에/모든 백지 위에/돌과 피와 종이와/재 위에/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그 한마디 말의 힘으로/나는 내 일생을 다시 시작한다/나는 태어났다 너를 알기 위해서/너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자유여.’
시인·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