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개한 대중과 비교하지 마, I don’t listen to ‘playlist’. 척쟁이들 사이 홀로 득도한 듯 슈게이징”
- O'Domar(오도마) - 《Hating mainstream is also too mainstream》가사 중
누구나 힙스터가 될 수 있는 시대다. 남들로부터 자신을 구분 짓기 위한 욕망을 취향으로 승화시키는 현상은 인류의 문화와 함께 시작했다고 봐도 무관하겠지만, 이만큼 수월하게 다른 취향을 가질 수 있던 적이 존재했나 생각해 본다면 묘한 기분이 들 것이다. 다름을 추구하는 힙스터의 이미지를 깔끔히 정의하려면 많은 고민이 필요하겠지만, 슈게이즈1 음악이 흘러나오는 헤드폰을 끼고 독립서점에서 사 온 책을 읽으며,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보며 눈물 흘리는 힙스터의 모습을 한 번쯤은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아니, 자주 찾아 봤을 법하다.
한국 사회를 관통하던 키워드가 늘 있었다. 키워드가 존재한다는 것은 단순히 해당하는 낱말이 사람들의 가십 거리로 소비된다는 것만 설명하진 않는다. ‘자수성가’, ‘자기계발’과 같은 키워드는 사회 구성원들이 이상적으로 바라보는 표상을 파악하는 중요한 틀이 되기도 한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부모의 도움 없이 가족을 재건하는 자식’, ‘성공을 위해 스펙을 쌓고 라이프 스타일마저 바꾸는 취준생’처럼 성공을 위해서라면 보고 배워야 하는 일종의 ‘정상성’이 있었다. 이러한 정상성이 현재도 자리를 굳게 지키고 있지만, 사회 분위기 변화에 발맞춰 대두되는 것이 어느새 보이지 않게 된 듯하다. 그렇다면 남은 건 취향이 아닐까.
취향이란 기본적으로 타인과의 차이에 기반해 비교하는 요소이기에 자수성가나 자기계발과 같은 키워드와 함께 놓기엔 거리가 멀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 볼 여지가 있지 않을까. 취향은 남들과 나를 구분 짓지만, 동시에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통해 즐거움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은 물론, 비슷한 정서나 관심사를 가진 이들과의 동질감을 만들어 주기도 한다. 타자화에 기초하면서도 동질성에 기대는 취향의 특이점이 새로운 정상성을 개발하는 것이다.
물론 취향으로 세운 정상성은 아무런 생산성을 담보하지 않는다. 능력주의적이고 불평등하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자수성가와 자기계발은 삶의 물질적 풍족이라는 ‘이미지’를 제공하지만, 취향은 그러한 이미지로서의 생산성조차 가지지 못한다. 완벽히 같아지고 싶지는 않은 것이 취향이기에 결국엔 사람을 더 외롭게 만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잉여적이고 불완전하기 때문에 오히려 키워드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더 이상 노력만으로 수도권 지역 주택을 구매할 수 없어진 사회, 계층 이동 사다리가 붕괴된 사회에서 사람들이 찾아낸 대안은 취향일 수 있다. 미래를 그려내기 힘들다면 현재의 우아함이라도 찾고자 하는 것이 당연하다.
1) 신발(Shoe)과 응시하다 (Gaze)라는 단어의 합성어로, 90년대 영국 인디 록 음악씬에서 인기를 끌던 장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