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회 3·15청년문학상 현상 공모 - 소설 부문 당선작 '낯과 방'
제5회 3·15청년문학상 현상 공모 - 소설 부문 당선작 '낯과 방'
  • 언론출판원
  • 승인 2024.08.06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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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부문 당선: 김민경(단국대학교 문예창작과·4)

 

낯과 방

 

  이케아 협탁을 조립하고 있을 때 새언니가 찾아왔다. 이사를 한 지 삼 일째 된 날이었다. 방에 있는 것이라곤 기본 옵션으로 제공되는 가전제품 몇 개와 책걸상, 중고 거래로 마련한 침대 하나가 전부였다. 그다지 넓지 않은 평수임에도 짐이 별로 없어서 트인 느낌이 들었다. 벽 한 면 전체를 덮고 있는 촌스러운 벽지만 눈에 띄었다. 휴양지처럼 보이는 바닷가에 돛단배 한 척이 정착해 있는 이미지였다. 하늘과 바다 모두 쨍하다 못해 눈이 아픈 파란색이었다. 벽지의 왼쪽 귀퉁이에는 이와 겉도는 노란색과 갈색의 모래사장, 야자수 나무 따위가 펼쳐져 있었다. 전체적으로 채도를 잔뜩 높여 보정한 것이 티가 났다. 방 한쪽에 쌓인 택배 더미에는 벽지를 가릴 패브릭 커튼도 들어있었다. 이삿날에 맞춰 주문한 용품들의 배송이 늦어져 이제야 도착했고, 나는 첫 출근 전에 방을 완성 시키고 싶었다.
  조립형 목제 협탁은 지지대 2개와 원목 상판, 그리고 캔들 같은 소품들을 올려둘 수 있는 하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나는 협탁의 지지대 하나와 상판의 나사 구멍을 겹쳤다. 미리 사둔 드라이버로 나사를 돌렸다. 드라이버가 자꾸만 헛돌았다. 구매한 사이트에서 제품의 리뷰를 둘러보니 다들 전동 드라이버를 사용했다. 나처럼 십자드라이버를 사용하다가 때려치웠다는 사람도 있었다. 전동 드라이버를 사러 나가야 할지 고민했지만, 집 주변에는 그럴 만한 곳이 없었다. 우리 집은 시 외곽의 버스 종점 근처였다. 마을 한 가운데를 가르고 있는 천변을 기준으로 오른쪽은 주택가, 왼쪽은 공단이 있었다. 옆집에 사는 사람도, 아랫집에 사는 사람도 모두 근처 공장에 다니는 근로자들이라고 했다. 종점에 내려 논길을 5분 정도 걸으면 내가 사는 빌라가 나왔고, 거기서 또 10분 정도 걸으면 가장 가까운 주택 하나가 나왔다. 이따금 고라니 우는 소리도 들렸다. 집을 잃어버린 사람의 비명 같은 그 소리가 마을 구석구석에 메아리를 만들어 어디쯤에서 고라니가 울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그 울음소리가 무서웠다.
  내 또래의 20-30대 여자는 보기 드문 동네였지만, 이곳으로 온 것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나는 독립을 하게 된다면 꼭 종점에 살아야겠다고 줄곧 생각해 왔다. 어릴 때부터 버스에서 잠드는 습관 때문에 종점이 익숙했다. 나는 늘 졸지 않기 위해 주의를 기울였지만, 언제나 졸음에 잠식당했다. 종점에 살면 내가 지금 지나고 있는 정류장이 어디인지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협탁을 바라보며 급한 대로 본드를 써야 하나, 생각하고 있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인터폰에 새언니의 얼굴이 보였다. 늘 시력 렌즈를 착용하는 새언니는 유독 안광이 반짝였다. 내 시선이 새언니의 어깨 뒤로 향했다. 오빠가 함께 왔나 싶었지만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새언니의 얼굴을 확인했음에도 잠깐 망설이다가 수화기 버튼을 눌렀다.
  저 왔어요.
  순간 우리의 만남이 약속되어 있던 것인지 헷갈렸다. 새언니와 최근에 나눴던 카카오톡을 되뇌었다. 새언니는 내게 일전에 어머님께서 말했던 ‘우는 한성이 입에 물려만 놔도, 온 집안에 평화가 찾아오는 과자’가 무엇이냐고 물었고, 나는 ‘아마 프링글스 어니언 맛 작은 통’일 것이라고 답한 게 끝이었다. 나는 무슨 일로 찾아왔냐고 물으려다가 그만뒀다. 어찌 됐든 새언니와는 일 년 전부터 가족이 되었고, 나는 아무런 언질 없이 찾아와도 가족에게는 나의 공간을 흔쾌히 내줘야 한다고 배워왔다. 지금이야 꼭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지만, 어릴 적에 형성된 나는 지금의 나에게도 아주 거대해서 이렇게 갑작스러운 순간에는 늘 배워 먹은 대로 행동하게 되는 것이었다. 출입문 개방 버튼을 누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현관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이에요, 아가씨.
  새언니가 눈으로 웃으며 말했다. 새언니의 배는 석 달 전보다 확실히 더 불러있었다. 대충 계산해 보니 임신 육 개월 차를 이제 막 넘겼을 것이었다. 새언니의 이마에 땀이 맺혀있었다. 나는 조립하던 협탁과 전동 드라이버를 구석으로 밀어뒀다. 임산부에 대한 도리로 편안한 자리를 내어주고자 했으나, 집에 있는 의자라고는 옵션으로 딸린 딱딱한 책상 의자 하나뿐이었다. 새언니는 의자에 나는 바닥에 앉았다.
  나는 새언니의 안부, 정확히는 새언니의 몸과 그 속에 자라나고 있는 아이에 대해 물었다. 무릎을 두드리던 새언니가 구슬이(아이의 태명이다)는 모르겠고, 제가 죽을 맛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새언니는 신혼 초부터 나에게 종종 데이트 신청 같은 걸 해왔다. 자기는 언니만 있어서 여동생 있는 사람들의 기분이 늘 궁금했다고 했다. 나는 임용고시 때문에 바빴고, 그건 새언니와의 데이트를 피할 좋은 핑계가 되어줬다. 나는 친언니가 없어도 언니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나는 새언니가 가끔 챙겨주는 용돈을 받으며, 모종의 죄책감을 느꼈지만 그건 잠깐이었다. 돈 없는 임용고시생에게 양심 같은 건 밥을 먹여주지 않았으니까. 
  새언니와의 마지막 만남은 네 달 전 아버지의 장례식에서였다. 그때까지 새언니는 임신 소식을 우리에게 알리지 않았었는데, 나중에야 알게 된 엄마는 그런 건 미리 말하고 장례식에 빠져도 되었다고 새언니를 조금 타박했다.
  첫 출근이 언제라고 했죠?
  살짝 열어둔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땀을 식히던 새언니가 물었다. 나는 부엌에서 물을 한잔 뜨며 대답했다.
  다음 주 화요일이요.
  새언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아 그때쯤 개학이겠구나, 짧게 중얼거렸다. 나는 집에서 버스로 사십 분 정도 떨어진 초등학교에 첫 발령을 받았다.
  어쩐 일이세요.
  내가 물었다. 방을 찬찬히 둘러보던 새언니와 눈이 마주쳤다. 새언니는 내가 제대로 된 자취는 처음이기도 하고 첫 출근도 앞두고 있으니 걱정이 되어서 왔다고 했다. 나는 별다른 반응 없이 그냥 그렇구나, 하고 있었다. 새언니는 뒤늦게 사실 그냥 지나가는 길이었다며 멋쩍게 웃었다. 오빠네 부부는 내가 살고있는 성남에서 이곳까지는 차로 한 시간 정도 걸렸다. 허허벌판인 이곳 주변에 새언니가 갈만한 곳이 있기는 한가 의아했지만 그러려니 했다. 나는 새언니의 모든 인연을 알지 못하니까. 
  새언니는 내게 무엇을 하고 있었냐고 물었다. 나는 새언니에게 물컵을 건넨 뒤, 손가락으로 구석에 밀어둔 협탁을 가리켰다.
  저거 조립 중이었어요.
  새언니가 물을 한 모금 들이키는 동시에 협탁을 빤히 바라봤다.
  방금 뜯은 거에요?
  나는 아니라고 답했다. 아마도 전동 드라이버가 필요할 것 같은데 그걸 사려면 또 버스를 타고 30분은 나가야 해서 중단한 참이라고, 그래서 그냥 본드로 붙여버릴 요량이라고 설명했다. 새언니는 그러면 안 된다고 손사래를 쳤다. 
  한 번 쓰고 버릴 거에요? 두고 두고 써야죠. 아껴야죠.
  본드로 붙여버리면 이사 갈 때 짐 싸기가 어려워 결국 버리게 된다고 했다. 그러곤 아마 차 트렁크에 전동 드라이버가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오빠가 혹시 모른다며 작은 공구 가방을 실어 놓은 것이었다. 새언니가 차에 다녀오겠다며 주섬주섬 일어섰다. 나는 괜찮다고 새언니를 말렸다. 이사 갈 때 협탁이 거추장스러워지면 그냥 버리면 그만인 것이었다. 하지만 나의 말림에도 언니는 끄떡없었다. 나는 현관으로 터벅터벅 걸어가는 새언니를 붙잡았다. 새언니는 하겠다고 결심한 것은 떡이 되더라도 하고 만다고, 그게 참 멋있어 보였다던 오빠의 말이 떠올랐다. 나는 새언니에게 차 키를 주면 내가 다녀오겠다고 했다. 몸도 무거운 새언니가 엘리베이터도 없는 4층을 오르내리게 하기 미안했다. 새언니는 잠깐 고민하다가 알겠다며 내게 차 키를 건넸다.
  주차장에 도착하자 새언니의 차가 보였다. 입구 근처에 주차된 새언니의 차로 다가갔다. 트렁크를 열자 온갖 잡동사니들이 눈에 들어왔다. 푹신한 슬리퍼와 쇼핑백, 여분의 임부복, 팬티 라이너, 배드민턴 채 따위의 것들이었다. 나는 트렁크의 가장 안쪽에 박혀있는 검은색 플라스틱 재질의 공구 가방을 끄집어냈다. 크고 작은 먼지가 소복이 쌓여있었다. 나는 갑작스레 호흡기로 들이닥친 먼지 때문에 기침을 한번 내뱉었다. 뚜껑을 열자 전동 드라이버를 비롯해 작은 몽키 스패너와 펜치 등등이 들어있었다. 조금 낡은 듯한 드라이버의 군데군데에 얇은 실금이 있었다. 
  이건 오빠가 10년 전에도 사용했던 드라이버다. 나와 오빠가 모두 본가에서 살고 있을 적에, 오빠는 자기 방의 인테리어가 마음에 안 든다며 벽지와 장판을 전부 다 뜯어낸 적이 있었다. 그때 새로 방을 꾸미며 쓰던 전동 드라이버가 확실했다. 나는 벽지를 뜯어내어 콘크리트가 다 드러난 오빠의 방에 몰래 들어가 우두커니 서 있곤 했다. 얼룩덜룩한 벽은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천천히 부식되어 갈라지고 약해져 있었다. 주먹으로 벽을 약하게 내려치자 시멘트 부스러기가 굽은 손날에 묻어 나왔다. 나는 오빠의 방이 금방이라도 쿵, 하고 내려앉는 상상을 했다. 침대에 누워 편안한 숙면을 취하는 오빠의 얼굴 위로 건물 자재가 처박힌다. 하지만 그로부터 10년이 지났음에도 우리 집은 흔들릴 기색 하나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 것이겠지. 나는 이 드라이버로 신혼집의 가구를 아주 듬직하고 믿음직스럽게 조립해 보이는 오빠를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나보다 다섯 살 위인 새언니는 언뜻 보면 나와 또래 같았다. 사회생활을 일찍 시작해서 그런지 넉살도 좋았다. 새언니는 특성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제법 큰 회사의 경리로 취직했다. 처우가 좋지는 않았지만 새언니는 악착같이 버텼다. 똥이 더러워서 피하는 건 전부 핑계일 뿐이라고 상견례 자리에서 굳세게 말하던 새언니를 엄마는 지금도 가끔 언급한다. 지금 새언니는 경리팀의 과장으로 있었고, 몇 달 후면 육아휴직 기간이 시작될 것이었다. 회식 자리에서 박 경리는 나중에 아기가 포식하겠어, 라고 말하며 평균보다 살짝 큰 새언니의 가슴을 힐끗거리던 인사팀 대리. (이건 새언니가 나와 둘만 있을 때 한 이야기다) 지금은 차장이 된 그 사람의 얼굴을 매일 같이 보면서도 출근하던 새언니가 회사를 쉰다. 나는 새언니의 임신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태어날 아이가 꼭 오빠보단 새언니를 닮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장례식장에 모인 친척들은 오빠의 칭찬을 하느라 바빴다. 오년 전 오빠는 행정고시에 합격했다. 안정적이고 높은 연봉과 연금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부모님은 물론이고 모든 친척들이 오빠를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작은아버지는 형님이 한성이 덕분에 편하게 눈 감으셨을 것이라며 눈물을 흘려 보였다. 나는 팔 톤 트럭에 치여 죽은 사람이 편하게 눈 감을 여유가 어디 있었겠냐고, 그냥 뚝 끊어져 버렸겠지 속으로 생각했다. 나의 임용고시 합격도 제법 화제가 되었고, 몇몇 어른들이 찾아와 내 등을 쓸어내렸다. 나는 집안의 어른들이 불편했기에 대충 웃으면서 감사하다고 기계처럼 꾸벅였다. 내가 그들이 불편한 만큼 나를 불편해하는 어른들도 많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주차장 구석에서 몰래 담배를 피우다 ‘지 오빠 앞길 막으려던 정신 나간 애’라고 나를 표현하는 목소리를 들었다.

  드라이버를 들고 현관에 들어서자 책상 방향을 보고 앉아 있는 새언니의 뒷모습이 보였다. 책상 한켠에 올려진 나의 교원 자격증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부러 헛기침을 했다. 새언니는 내가 온 것을 깨달았는지 몸을 돌리며 동시에 교원 자격증을 들어 올렸다. 
  아가씨는 멋진 선생님이 될 것 같아요.
  그 빳빳한 종이에 무슨 비밀이라도 숨겨져 있는 줄 아는지, 천장 등불에 교원 자격증을 비춰보던 새언니가 확신이 깃든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터무니없는 확신에 당황하며 대답을 하지 못했다. 멋진 선생, 그 추상적이고 커다란 말에 어떤 저의가 포함되어 있는지 예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근데 여기 벽지가 참 마음에 드네요.
  너무 뜬금없어서 대화의 흐름을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나는 새언니의 표정을 훑었고, 저건 하고 싶은 말을 망설이다가 횡설수설하는 얼굴임을 알아차렸다. 새언니는 무언가 할 말이 있어서 이곳에 온 것이 확실했다.
  새언니는 인위적으로 새파랗게 보정된 하늘과 바다, 그리고 조잡하게 합성된 돛단배의 조화가 계속해서 마음에 든다고 중얼거렸다. 새언니의 머릿속에 떠다니고 있을 문장을 낚아채고 싶었지만, 망설이는 이유가 있겠거니 하며 기다려보기로 했다.
  돛단배가 커다란 게 눈에 잘 들어와서 좋아요.
  새언니가 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더니 말했다.
  네?
  나는 새언니가 어디까지 하나 계속해서 지켜봤다. 
  아가씨, 받침에 치읓을 둔 단어들은 뜻이 명확한 것 같지 않아요?
  …….
  꽃이나 빛, 닻과 돛 같은 단어 말이에요. 이 단어들은 어느 문장에 붙어 있어도, 다른 단어랑 결합을 해도 계속 의미가 명확하잖아요.
  새언니는 벽지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전 치읓이 좋아요. 근데 치읒은 센 소리에 비해 발음이 부정확해서 디귿으로 치환되어서 입 밖으로 나와요
  혼자 즐거운 듯 웃는 새언니가 나는 조금 골 때린다고 생각했다. 새언니는 내가 여태 겪어본 적 없는 유머로 대화의 흐름을 이끌고 갔다. 새언니는 가족들에게도 이런 농담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겠지. 오빠도 새언니가 끌고 가는 흐름에 순식간에 휩쓸리고 잠겼다가, 다시 뭍으로 나오면 해가 조금 더 밝아진 것처럼 느끼겠지. 나와 오빠는 절대 가질 수 없는 그 밝음을.
  이제 조립 해볼까요?
  새언니가 내 손에 협탁의 상판을 쥐여줬다. 방금까지 들고 있던 전동 드라이버는 이미 새언니의 손에 가 있었다. 나는 조립같은 건 해본적이 없어서 새언니가 시키는대로 따르기로 했다. 손잡이 끝에 달린 선을 콘센트에 연결하고 스위치를 누르자 튀어나온 드릴이 돌아갔다. 한 손에는 전동 드라이버, 다른 한 손에는 지지대를 잡은 새언니가 이리저리 몸을 움직였다. 이내 편안한 자세를 찾았는지 나에게 바닥에 있는 나사를 주워달라고 했다. 나는 나사를 주워 언니에게 건넸다.
  꽉 잡고 계세요, 아가씨.
  윙, 하고 드릴 돌아가는 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우리는 숨을 죽였고, 새언니가 허리를 숙여 나사 구멍 가까이 얼굴을 가져다 댔다. 십자 드라이버로 몇 번이나 돌려도 들어가지 않던 나사가 순식간에 빠른 속도로 회전하며 구멍에 박혔다. 지지대와 상판이 흔들리지 않게 꽉 잡고 있던 내 손에 새언니의 따듯한 숨이 닿았다. 나는 새삼 새언니가 우리 집에 와 있는 것이 생경하게 느껴졌다. 아직 나 말고는 아무도 들어와 보지 않은 이 공간에 새언니가 있다. 일 년 전까지 아무런 사이가 아니었던 우리가 가족이 되어서 지금 여기에 함께 있다. 새언니는 나에게 지지대를 반대쪽으로 뒤집어 달라고 했다. 그리곤 뒤집은 지지대에 하판을 가져다 댔다. 또다시 전동 드라이버가 윙, 윙, 돌았고. 나는 속으로 새언니, 라는 단어를 반복했다. 새언니, 새언니, 새언니. 정말 새삼스러운 일이었는데, 그래서 새삼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언니면 언니지 새언니는 또 뭔가. 말 그대로 새로운 언니라는 뜻이겠지. 친구들은 언니의 남편을 형부라는 오래되고 케케묵은 호칭으로 부르던데, 오빠의 아내에겐 왜 다들 올케보다 새언니라는 호칭을 많이 쓸까. 나는 어찌 됐든 올케라는 말보다는 새언니라는 말이 덜 가족 같아서 좋다는 생각을 하다가 새언니가 우리의 가족이 된 게 기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새언니의 친언니를 떠올렸다. 새언니와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본 것이 마지막이었다. 새언니의 얼굴 특징을 삼십 퍼센트 정도 베이스로 해서 새롭게 조합하고, 수정하고, 변주한 느낌이었다. 연년생인 새언니네 자매는 자주 붙어 다니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성격도 비슷해 보였다. 장례식장에서 사돈 언니는 엄숙한 표정으로 예의를 갖추는 중이었지만 엄마나 오빠에비해 얼굴에 여유로움이 있었다. 나는 두 사람이 나란히 대화하는 모습을 휴게실 구석에서 여닫히는 문을 통해 잠깐잠깐 바라보면서, 정말 피는 못 속이는 것이구나 하면서 조금 처연해졌다.
  이런 생각을 머릿속으로만 하고 있었는데, 새언니의 입에서 사돈 언니의 이름이 나왔다.
  중학생 때, 저희 집에 이모네 가족들이 놀러 왔거든요? 그날 저는 제 방을 6학년짜리 사촌 동생에게 내어주고 민주 언니 방에서 같이 잤어요. 그런데 시간을 예측할 수도 없을 만큼 깊은 새벽에 갑자기 문이 열리는 거예요. 처음에는 엄마인 줄 알았어요. 엄마는 종종 새벽에 우리가 잘 자고 있는지, 몰래 도망가서 친구들이랑 노는 건 아닌지 확인하러 들어왔었거든요. 저는 잠에 푹 담겨져 있었고, 잠깐 깼다가 금방 또 잠에 들었어요. 그런데 문이 열린 채로 한참 동안 안 닫히는 거예요. 뭔가 이상해서 다시 깼어요. 희미한 의식으로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데, 방 안으로 들어오는 걸음 소리가 들렸어요. 침대 다리 맡에 서 있던 사람이 이불 아래로 손을 넣었어요. 그때 제가 반바지를 입고 있었거든요? 근데 반바지 틈 사이로 손바닥이 하나 들어오는 거예요. 소름이 돋았는데,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몰라서 그냥 굳어버렸어요. 손이 팬티 근처까지 왔을 때 슬쩍 실눈을 떴는데, 사촌 동생이었어요.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고민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듣기 역겨운 이야기였는데, 새언니는 편안한 표정이었다. 새언니는 역광 때문에 검게 보이는 사촌 동생의 얼굴을 보고 놀라 다리를 움찔거렸다고 했다. 허벅지 안쪽을 타고 올라오던 사촌 동생의 손바닥이 멈추고, 곧 손을 빼낸 뒤 방 밖으로 도망치듯 나갈 때까지 새언니는 눈을 꾹 감고 있었다. 심장이 너무 두근거렸지만 소리를 내지 않았다. 민지 언니가 깨지 않도록 숨을 죽였다. 곧 창밖으로 날이 밝았다. 아침 식사 시간이 왔고 사촌 동생과 밥상에 마주 보고 앉았다. 사촌 동생은 잠을 푹 자고 일어난 듯 얼굴이 반질반질했다. 사촌 동생은 평소 말도 잘 듣고, 때문에 새언니도 많이 예뻐했다고 했다. 새언니는 태연한 척 밥을 먹고 있었고, 맞은 편에 앉은 사촌 동생의 숟가락 위로 이모가 계란말이를 올려줬다. 새언니는 일단 입을 다물고 있기로 했다. 뭘 잘 몰라서 그랬던 거라고, 한 번의 실수일 뿐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나는 생김새도 모르는 새언니의 사촌동생 얼굴을 떠올린다. 새언니의 허벅지를 만지작거리던 사촌동생의 얼굴은 아마 아주 아주 검붉었을 것이다. 나는 그런 걸 알 수 있다.
  처음에는 제가 꿈을 꾼 건가 싶었어요. 하지만 그건 분명히 아니고……. 그런데 사촌 동생이 이모 말도 잘 듣고, 계속 좋은 성적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제가 걔를 이해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 한창 사춘기에 호기심도 많았을 테니까. 밖에 나가서 하는 것보단 나한테 그러는 게 일도 키우지 않고 괜찮았어. 한번 그런 건데 뭐. 그런데 성인이 되고 나서 한 번은 민지 언니가 그러는 거예요. 걔 우리 집 오면 가끔 내 방 들어와서 우리가 자는 거 지켜보다 갔잖아. 내 다리도 만지던데?
  나는 속으로 더러워, 하고 혼자 중얼거렸다.
  저는 순식간에 기분이 너무 좆 같아졌어요. 나한테도 그런 적이 있다고 민지 언니에게 말했어요. 민지 언니는 그 새끼 진짜 역겹네, 하며 화를 냈어요.. 저는 그래도 평소에 잘 지내는 사촌 동생을 미워해서 좋을 게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민지 언니를 타일렀어요. 혼자 사촌 동생의 변호, 뭐 그런 것도 했고요.
  새언니가 내앞에서 욕하는 모습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저는 왜 사촌 동생을 변호하지 못해서 안달이었을까요? 또 왜 민지 언니와 나는 똑같이 입을 다물고 있었을까, 그 새벽에 왜 숨소리 하나 내지 않았을까, 한참을 생각했어요. 귀신에 홀린 것도 아닌데 말이에요.
  새언니는 물을 한 모금 더 마셨다. 
  어리면 뭘 모르는게 정상인데, 저희는 그때 뭘 좀 알고 있었나봐요.
  온도 차 때문에 유리컵 표면에 물방울이 맺혀있었다. 물방울이 표면에서 흔들거리더니 또르르, 떨어졌다. 입이 닿는 곳 쪽에 있던 물방울이 떨어지면서 아래쪽에 있던 작은 물방울들과 하나가 됐다. 크고 작은 물방울이 합쳐져 큰 물방울이 만들어졌고, 큰 물방울이 지나간 자리에는 말끔한 길이 하나 생겼다. 유리컵의 바닥 쪽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물방울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닥에 떨어졌다. 나는 그 길이 자꾸만 눈에 들어왔고, 그걸 빤히 쳐다보는 동안 새언니는 무엇을 보고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가씨는 치읓에게 치읓의 소리를 만들어주는 선생님이 될 거에요. 
  그 말을 들은 나는 새언니가 나를 떠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나에게 지금 당장 사실을 말해보라고 아주 정성 들여 가스라이팅을 시도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또한 이걸 가스라이팅이라고 생각하며 분노하는 내 자신이 어디까지 꼬인 건지 판단하기도 어려워서 화가 났다. 새언니가 장례식장에서 무슨 얘기를 듣고 온 것인지 알 것 같았다. 창밖에서 와악인지, 끼악인지 고라니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


  ‘정신이 나갔던’ 그날, 나는 고등학교 1학년이었고, 파출소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성추행을 당했어요.
  나는 경찰관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경찰관은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자리에 앉혔다. 경찰서 안은 조용했고, 무서워 보이는 사람들이 취조받고 있지도 않았지만 나는 움츠러들었다. 경찰관은 자세하게 이야기해달라고 했다. 나는 몇 번이고 연습한 문장들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몇 살 때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아요. 아마 대여섯 살 때쯤인 것 같아요. 하지만 그 얼굴만은 아주 오랫동안 선명하게 기억해왔어요. 제 몸 위에 올라타 지그시 누르던 압력을 기억해요. 제 두 손목을 한 번에 움켜쥐던 손바닥의 살갗을 기억해요. 재밌는 걸 같이 하자고 속삭이던 숨을 기억해요. 그때 보았던 앳된 성기를 기억해요. 그 사람은 계속 그걸 보라고 했어요. 만져보라고도 했어요. 저는 가슴을 누르는 체중이 답답해서 발버둥 쳤어요. 저는 그게 어떤 것인지 잘 몰랐지만, 그 사람은 엄마에게 말하지 말라고 했어요. 절대 절대 말하지 말라고요. 그 사람은 지금 저희 집에 있어요. 그 사람은 저희 오빠예요. 오빠는 저보다 여섯 살이 많구요, 그리고…….
  내 말이 길어질수록 경찰관의 표정은 점점 평온해졌다.
  학생 이름이 뭐야? 주민등록번호 불러줄래?
  나는 갈피를 잡지 못하던 눈동자를 경찰관에게 고정했다. 경찰관은 웃고 있었다. 나는 그 웃음이 나를 안정 시키기 위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19살이요. 이름은 현한주고, 구칠공이공팔…….
  컴퓨터를 몇 번 두드리던 경찰관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예, 여기 동부 경찰섭니다. 현한주 학생 어머니 되십니까?
  수화기 너머로 엄마의 목소리가 작게 들렸다. 경찰관은 내가 한 말들을 몇 개만 골라내서 엄마에게 전했다. 전화가 마무리되어 갈 즈음에는 집안에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인 것 같다고 부연했다. 엄마의 음성은 뭉개져서 잘 들리지 않았다. 무슨 대화를 나누는 것인지 경찰관이 계속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전화를 끊은 뒤엔 엄마가 곧 경찰서로 나를 데리러 올 것이라고 했다. 오빠랑 잘 이야기해 봐, 라고 말할 때는 ‘빠’를 발음하는 동안 입술이 오므려졌다가 다시 벌어졌다. 벌어진 입에서 침이 튀었다. 나는 얼굴에 내려앉은 침방울을 느꼈고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더러워, 더러워, 더러워, 더러워, 더러워, 더러워.
  나는 빠른 걸음으로 경찰서를 빠져나왔다. 뒤에서 학생, 하고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한참을 걸었고 어디로든 사라져 버리고 싶었다. 길거리에 띄엄띄엄 서 있는 가로등의 불이 켜지고, 핸드폰에서는 연신 진동이 울렸다. 아까 얼굴에 튄 침이 해가 질 때까지도 마르지 않은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 올라탔을 때까지도 머릿속에는 더럽다, 라는 단어가 떠나가질 않았고.
   그날 처음 잠들지 않은 채로 종점까지 갔다. 핸드폰이 뜨거워질 정도로 연달아 전화를 거는 엄마가 들어있을 아파트가 창밖으로 보였지만 하차벨을 누르지 않았다. 우리 가족은 늘 어딘가 삐그덕거려도 다음날부턴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이. 곯은 곳은 곯은 대로 두었고, 한 번씩 삭혀두었던 것이 튀어나오는 날이 있더라도 해결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내가 지금 이렇게 뭣 같다, 이야기하면 근데 너만 그렇냐 나도 그렇다. 너 같은 걸 바란 적도 없다,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게 서로의 뭣 같음만 인지한 채로 다시 살았다. 이해로 넘어간 적도, 인정으로 나아간 적도 없었다. 우리는 그렇게 유지되는 공동체였다.
  버스는 모든 노선을 다 지나쳐 종점에 도달했다. 하차문이 열리고, 버스의 시동이 꺼질 때까지 나는 내리지 않았다. 여기가 종점이니 얼른 내리라는 기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버스에서 내리자, 자주 보던 종점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출발을 기다리고 있는 버스들이 갓길에 일렬로 정차되어있었다. 3m 정도 떨어져 주차된 버스의 기사님이 유리창에 묻은 새똥을 닦아내는 게 눈에 들어왔다. 정류장을 10개 지나치든, 50개 지나치든 버스는 이곳에 모인다. 노선을 달리는 동안 묻은 오물과 승객들이 버리고 흘린 쓰레기를 청소한다. 잠시 숨을 고른 버스는 다시 똑같은 노선을 반복한다. 나는 붉은 낯이 있는 그곳으로, 제 발로 다시 걸어 들어갈 것이다. 그렇게 배워먹었다.
    지금도 그 붉은 낯이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진다. 나는 그 낯의 의미를 아주 오랜 기간에 걸쳐 알게 되었다. 당시의 나는 아마도 대여섯 살쯤이었고, 대부분의 그렇듯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의 일들을 나는 잘 기억하지 못했다. 파편적으로만 기억이 이미지처럼 남아있을 뿐이었다. 나는 단지 그 낯을 기억하고 있는 나를 계속해서 기억해 나갔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가족도 나에게 나쁜 행동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불쾌감마저도 당연하게 생각할 뿐이었다. 중학생이 되어서야 그것이 명백한 성추행이었으며, 나는 나를 지킬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혹시 내가 꿈을 꿨던 건 아닐까, 어디서 본 기사를 나에게 있었던 일이라고 착각하는 게 아닐까, 나보다 6살이나 많은 오빠가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는데, 왜 아무런 언급도 사과도 없는 건지 의문이었고, 결국 나는 수없이 나를 의심하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기억은 쉽게 편집하고 수정되는 허술한 것이니까. 하지만 내가 느꼈던 그 압력만은 지금까지도 너무나, 너무나 생생해서 나는 누군가가 내 몸을 누를 때마다 숨이 턱 막혔다. 


*


  전동 드라이버의 소리가 몇 번 반복되자 협탁이 그럴듯한 모양새를 갖췄다. 새언니의 이마에 말랐던 땀이 다시 맺혀있었다. 새언니 땀을 훔치며 뿌듯한 듯 협탁을 들어 보였다.
  단단히 박아뒀으니까 쉽게 망가지지는 않을 거예요.
  나는 협탁을 흔들어봤다. 일말의 틈도 없이 지지대와 상판, 하판이 정교하게 붙어있었다. 침대 머리맡 옆에 협탁을 배치했다. 새언니는 협탁과 침대가 둘 다 원목이어서 잘 어울린다고 했다.
  신체 구조 상 받침 치읓은 자기 소리를 낼 수가 없어요.
  오랜 침묵 끝에 내가 처음으로 뱉은 말이었다. 우리는 다시 각자의 자리에 앉았다. 새언니는 여전히 땀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새언니의 손에 든 물컵을 다시 받아 들고 물을 다시 채워왔다. 나는 새언니의 생각이 위험하다고 말했다. 새언니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렇잖아요. 똑같아 보이는 것도 어떤 건 폭력이고 어떤 건 교육이라고 하니까요. 어제도 교사 한 명이 죽었대요.
  이번에는 새언니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전동 드라이버의 움직임이 멈춘 방은 적막했다.
  나는 새언니를 주차장까지 배웅해주겠다고 했다. 새언니는 전동 드라이버를 사용하라며 나에게 주고 갔다. 나는 감사하다고 말하며 받아들었다. 주차장을 완전히 빠져나갈 때까지 우두커니 그곳에 서 있다가 방으로 돌아왔다. 창밖으로 새언니의 차가 보였다. 넓은 논밭 가운데에 좁고 구불구불하게 난 흙길을 새언니의 차가 힘겹게 굴러가고 있었다. 나는 언니의 차가 아예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계속 창밖을 바라봤다. 
  오 분쯤 지난 뒤에 새언니에게 문자가 왔다. 사진 한 장과 함께였다. 4차선 도로로 빠지는 샛길 가운데에 고라니 한 마리가 쓰러져 있었다. 차에 치인 것 같았다. 나는 예전부터 몇 번 본 광경이었지만, 새언니는 놀란 모양이었다.
  [어떡해요…….]
  나는 지역번호 뒤에 120을 붙인 번호로 신고하면 된다고 알려줬다.
  [구슬이가 많이 놀랐겠어요. 그런 걸 봐서. 얼른 집에 가서 쉬세요.]
  종점은 필연적으로 인적이 드물고 고라니가 출몰하며, 고라니는 높은 확률로 차에 치인다.
  나는 새언니가 쓴 유리컵을 씻어내고, 쌓아둔 택배의 포장을 뜯어서 박스를 배출 장소에 내다 놨다. 협탁 위에 올려진 드라이버에는 아직 발열감이 남아있었다. 이케아에서 주문한 제품들은 대부분 조립형이었지만, 나는 새언니가 두고 간 드라이버를 영영 쓰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

 

 

제5회 3·15청년문학상 소설 부문 심사평

  소설은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얼마나 잘 형상화하는가에 따라서 깊이가 달라진다. 올해 3·15 문학상의 소설 부문 응모작들 중에는 이러한 주제의 형상화가 잘 이루어진 작품들이 많았다. 참 기쁜 일이다. 
  그 가운데서도 <낯과 방>, <해바라기>, <향> 등 세 작품은 특히 맨 위 칸에 올려놓을 만했다. 이 작품들은 주제의 형상화뿐만 아니라 공감이나 고통의 연대감에 대한 깊은 통찰력까지 함유하고 있어서 좋은 점수를 줄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낯과 방>이 특별히 뛰어난 이유는 가족 내에서 발생하는 유아 성폭행의 사회적 문제라는 주제 의식을 형상화함에 있어서 섬세한 관찰력과 상징화를 지속하는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종점’, ‘드라이버’, 그리고 작품의 마지막까지 지속되는 ‘치읓’ 발음으로 끝나는 단어에 대한 고찰은 이 작품을 끝까지, 그리고 반복해서 읽게 하는 동력이 되고 있다. 이러한 상징을 열어주는 나와 새언니와의 대화를 통해 등장인물의 성격을 형상화하는 창작기법의 우수성까지 갖추고 있다. 
  다만 어린 시절 오빠에 의한 성추행을 밝히게 되는 시점에 대한 근거, 그 사건 후 가족의 태도에 대한 이야기 전개가 좀 말끔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 이 점을 잘 마무리한다면 더 매력적인 작품이 될 것 같다. 앞으로 어떤 작품을 계속 써 나갈지가 궁금해지는 청년 작가의 탄생을 축하한다. 

김은정(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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