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1950년대 말, 전쟁의 폐허 위에서 태어난 ‘베이비 붐 세대’의 한 사람입니다. 1977년에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산업화·민주화에 막 성공하여 88올림픽이 열리던 그 해에 모교의 교수가 되었고, 최근 2월 말에 정년퇴직했습니다.
가난한 집안에서 대학 진학하게 된 것은 기적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 시절 경남대는 완월동에서 월영동으로 이사해서 비약적으로 성장하고 있어도, 아직 ‘멸치가 생선이가, 경남대가 대학이가’ 이런 소리가 남아 있어서 제게는 비호감이었습니다. 그러나 운명적으로 ‘한마인’, 경제학과 학생이 되었고, 월영언덕에 두 발을 굳게 딛고 서기 위해서 힘껏 노력했습니다.
뒤돌아보니 경남대학에는 세칭 ‘SKY대학’보다 제게는 엄청난 장점이 있었습니다. 우리 대학의 ‘진리, 자유, 창조’라는 이념 중에서 ‘자유’를, 잘난 대학 학생들보다 더 큰 ‘학문의 자유’를 저는 누렸습니다. ‘의식화 선배’들이 거의 없어서 스스로 고민하며, 경제, 정치, 철학, 종교까지 자유롭게 공부할 수 있었던 겁니다. 민족분단과 휴전, 후진국, 유신독재,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등등에 절실한 의문이 너무 많았습니다. 생사가 걸린 그 의문을 풀기 위해 온갖 책을 읽으면서 미친 듯이 ‘공부하는 자유’를 누린 겁니다.
’80년대 초에 제가 ‘인서울 대학원’으로 진학했을 때, 대부분의 교수와 학생들은 보수나 진보나 소위 ‘이념의 노예’들이었습니다. 박사과정에 가도 ‘경제철학’ 같은 기초 교과목이 없으니 고등교육조차 참 부실했습니다. 저도 잠시 교수와 선배들의 권위에 억눌렸지만, 다행히 곧 다시 대학 학부 시절의 ‘자유로운 영혼’을 되찾았지요.
교수가 되어서도 기존 이론-현실에 대한 자유로운 의문과 도전으로 험난한 시행착오를 계속해 나갔습니다. 전통적 공부법을 배우며, ‘진보 속의 비주류’가 되었다가, 보수와 진보를 넘나들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신라시대에 ‘유·불·선’ 통합을 이곳 월영 언덕에서 꿈꾸던 고운 최치원 선생의 원대한 정신을 이어받아서 동서양 학문의 통합 그리고 ‘한류 정치경제학’과 ‘새로운 K-민주주의’를 꿈꾸게 되었습니다. “아집을 버리고, 공부하는 자유를 누리는 만큼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있다” 이것이 제가 체득한 철학입니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지금, 여기’ 내가 딛고 선 삶의 현장에 문제와 답이 있다. 먼저 제 발밑을 비추어 보라(照顧脚下)” 이것이 제 ‘공부와 일과 삶의 철학’입니다. 제 삶의 소중한 무대인 경남대학교와의 인연에 깊이 감사하며, 희망의 철학을 독자 여러분들과 나누려 합니다.
정성기(경제학과 졸업 동문, 前 부동산경제금융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