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습기자로 들어와 처음 받은 자유 글쓰기 과제물의 완성본을 선배에게 떨리는 손으로 제출하던 때가 엊그제 같지만, 벌써 편집국장이 됐다. 붉은 색으로 된 취소 선이 잔뜩 그어진 원고 를 보며 머리를 긁적이던 순간이 생생하지만, 이젠 어떻게 하면 기분 나쁘지 않은 방식으로 기자들의 원고에 피드백을 첨부할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 격세지감이라는 말이 이렇게 어울리는 상황이 있을까. 생경한 마음으로 첫 월영지 원고 작성을 시작해 본다.
글을 쓰기에 앞서 어떤 주제를 설정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 ‘앞으로 학보사를 어떻게 꾸려나가야 할지’, ‘어떤 현안에 주목할지’와 같이 미래 계획을 정리하는 글을 써보면 어떨까 싶었지만, 금방 포기했다. 앞날을 고민하는 것은 물론 중요하지만, 내가 글쓰기에 가진 태도가 굳건하게 서있지 못하면 큰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거창하게 훗날을 다짐하기보다는 소박할지언정 현재의 상태를 점검하고 싶었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이고, 동시에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임의로 나눈 분류지만, ‘잘 쓴 글’과 ‘좋은 글’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문장으로 구성된 글은 분명 잘 쓴 글이다. 하지만 잘 쓴 글이 꼭 좋은 글이 되는 건 아니다. 두서 없는 긴 문장으로 이루어진 글이 잘 쓴 글은 아니겠지만, 진지한 태도가 성실히 반영되었다면 좋은 글이 될 수 있다. 나는 서툰 언어로 적혔을지라도, 다루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깊은 고민과 글에 대한 성찰의 흔적이 보이는 ‘좋은 글’에 애착이 간다. 편집국장으로서, 학보에 잘 쓴 글을 채우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좋은 글을 가득 담고 싶은 욕심이 크다. 학보사에서 유명 언론사 수준으로 ‘잘 쓰인’ 문장을 선보이기는 어렵겠지만, ‘좋은 글’을 쓰는 건 목표로 삼을 법하지 않겠나. 학보사가 타 언론과 차별화된 매력을 독자에게 전달하려면 좋은 글을 가능한, 많이 쓸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좋은 글의 기준도 어디까지나 개인의 주관일 수밖에 없다. 내가 보기에 충분히 고려되지 않았다고 느껴지는 원고도 해당 필자의 고유한 태도가 반영된 결과물일 수 있다. 첨삭에 내 사견만 반영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반영해서도 안 된다. 내용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쓰인 글은 그 자체로 소중한데, 큰 고민 없이 수정하는 건 첨삭자로서 해서는 안 될 독선이다. 다 른 필자의 원고에 취소 선을 그을 때 늘 뒤따르는 불편함의 출처는 아마 이러한 생각일 테다. 동료 기자가 납득할 수 있는 첨삭이란 무엇일지, 방법을 늘 고민하게 된다.
좋은 글에 대한 욕심과 첨삭자로서 가져야 할 윤리가 자꾸만 경합한다. 두 가지를 오롯이 챙기려는 마음이야말로 가장 큰 욕심이겠지만, 최소한 절충안은 찾아야 하지 않을까. 편집국장이라는 직책으로 쓰게 된 첫 월영지 원고인 만큼 이런 고민과 갈등을 담아 보려 했다. 잘 쓴 글인지도, 좋은 글인지도 모르겠지만, 앞으로의 학보사 활동에 자양분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