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회 10·18 문학상 현상 공모 - 단편소설 '스노하라의 한국에서 보물찾기'
제35회 10·18 문학상 현상 공모 - 단편소설 '스노하라의 한국에서 보물찾기'
  • 정주희 기자
  • 승인 2021.12.01 14: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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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부문 가작: 서준교(역사학과·3)

스노하라의 한국에서 보물찾기

 

   어느 날, 한 네티즌이 인터넷 사이트에 질문글을 올렸다.

  "제가 옛날, 아마 2006년인가 7년쯤 부산 비디오방에서 <도라에몽>을 빌려 봤어요. 평소에 <도라에몽>을 챙겨봤는데 마침 비디오방에 도라에몽 비디오가 있는 거예요. 흰색 뚜껑에 유성펜으로 ‘도라에몽’ 한 글자 한 글자 커다랗게 써 놓은 비디오였어요. 기쁨 맘에 돈 주고 들뜬 마음으로 집에 달려가 비디오를 재생했더니, 웬걸? 일본어 노래가 나오고 한글 자막은 하나도 안 나오는 데다 디자인도 제가 아는 <도라에몽>이 아니었어요. 도라에몽 입에서 아저씨 목소리가 나오고 진구는 빨강 티셔츠를 입질 않나 진구 엄마가 도라에몽에게 화내며 식기를 던지며 쫓아낼뿐더러 퉁퉁이는 안경 쓴 남동생이 가게 일을 보고 다른 캐릭터 그림체도 이상해서 이건 내가 아는 도라에몽이 아니었어요. 거짓말에 속은 기분이었죠. 그래서 곧장 비디오방에 달려가 돈 물어 달라고 떼를 썼어요. 아저씨가 어리둥절하시다가 저의 부탁을 받아줘 환불해 주셨어요.

  어른이 되어 일본 N본부에서 만든 <도라에몽>이 존재하며 현재 사진 몇 장 말곤 볼 수 없다는 이야기를 제가 다니는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우연히 알게 됐는데, 그 게시글 내용이 제가 어릴 적 본 <도라에몽>과 매우 유사했어요. 아무래도 과거에 N본부 <도라에몽>을 빌려 본 것 같은데 그럼 어째서 한국에 <도라에몽>이 남아 있는 건지 몹시 궁금해서 그 비디오방에 들렸더니 이미 문을 닫은 지 오래되었더라고요. 가게가 문을 닫아서 제가 본 게 정말로 N본부 작품이 맞는지 의심이 드는데, 정말로 제가 본 게 N본부 <도라에몽>이 맞나요?"

  이어 질문글에 달린 댓글 하나.

  "저도 본 것 같아요. 혹시 부산 금정구 서동 ‘부엉이 비디오’ 가게에서 빌려 보셨죠? 저도 봤습니다. 퉁퉁이 동생이 콘크리트를 손으로 내리치자 엄청 아파하던 게 생각나요. 성적표 가지고 혼나는 것도 기억나고 오리처럼 생긴 로봇인지 뭔지 모를 동물도 나왔어요. 자막 없이 일어를 들으며 봤는데 나름 재밌었던 것 같아요. 아, 맞다! 도라에몽 목소리도 중간에 여자 성우 목소리로 바뀌었어요! 분명히 기억나요!"

  이것이 스노하라가 한국에 온 이유다. 한국에서 우리나라 사람 소수가 일본 땅에선 볼 수 없는 N본부 <도라에몽>을 본 적 있다는 질문글과 댓글이 온라인을 통해 건너 건너 일본 커뮤니티 사이트에 알려져 호기심을 자아냈는데 스노하라도 그중 한 명이었고 혹시 한국에 남아 있을지 모르니까 함께 찾아보자는 뜻에서 일본에서 한국까지 온 것이다. 나는 처음에 한국은 지금 비디오방 다 사라져서 없으니 깔끔하게 포기하라고 문자를 보냈지만 스노하라는 쓸데없이 의욕을 불태우며 같이 찾으러 가자고 자꾸만 날 졸랐고 문자 폭탄에 비견될 떼쓰기 문자 전송에 결국 내가 백기를 들고 동행해 주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오늘, 스노하라가 부산에 도착했다.

  소형 캐리어 바퀴를 매끄럽게 끌고 공항 출구로 나오는 스노하라의 표정은 기대에 부풀어 입이 찢어질 듯한 스마일이었고 눈동자는 기대에 차 초롱초롱 별이 보이는 듯한 눈동자였다. 나는 스노하라가 너무 기대하는 것 같아 걱정되었다. 그래서 내 나름대로 계획을 짜 비디오 찾기 잠깐 나섰다가 이내 부산 거리를 구경해 주고 밥도 사주고 재워주며 둘만의 부산 여행으로 자연스레 둔갑시키기로 마음먹었다. 이젠 버리는 물건이 된 비디오를 2021년에 와서 찾으러 한국까지 온 스노라하 때문에 내가 고생을 하게 될 것 같아 걱정이 되었다. 내가 나서야 한다니, 학창 시절 스노하라를 생각을 하면 솔직히 귀찮다. 친한 친구가 아니었으면 절대 받아주지 않을 부탁이다.

  “오! 지우상!”

  스노하라가 나를 발견하자마자 캐리어를 빠르게 끌며 내게 다가와 반가움 가득한 얼굴로 인사했다.

  “반가워 지우상! 오랜만이라 설레는데?

  “나도 반가워.”

  귀찮음을 숨기고 나도 스노하라를 반갑게 맞이했다. 스노하라가 한국에 온 이유가 황당하긴 하지만 어쨌든 친구이니까. 나는 스노하라와 간단히 몇 마디 주고받고 곧장 근처 카페로 향했다. 카페 구석진 테이블을 찾아 앉은 우리는 서로 반가워 그동안 제각기 있었던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하하하 웃으며 즐겁고 훈훈한 분위기를 이어갔다. 주문한 커피가 나오자 나는 한 모금 들이켰다. 스노하라 역시 커피 한 모금 마신 후 <도라에몽> 비디오를 찾으러 한국에 온 자신을 도와줘서 고맙다고 얘기했다. 스노하라 표정을 보니 너무 기대하고 있어서 부담스러웠다. 스노하라가 커피를 테이블에 놓고 아이폰을 꺼내 메모 앱을 열어보며 말했다.

  “부산 금... 종구?”

  “부산 금정구.”

  스노하라가 살짝 흥분한 채 어리숙한 한국말을 하자 내가 정확한 이름을 말해주었다. 스노하라는 비디오 찾기 계획을 내게 얘기해 줬다.

  “금정구 서동에 가서 거기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보자. 그 비디오방이 어디 있는지 물어보자. 이게 내 계획이야.”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간단하고 무식한 계획을 진심 담아 말하는 걸 본 순간 웃음이 나올 뻔했다. 나의 반응을 무시하듯 스노하라는 열정과 기대가 가득 찬 불타는 눈동자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N본부 <도라에몽> 비디오는 희귀한 걸 떠나 보물이나 다름없어. 일본에서 그걸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제작 주임 한 사람 뿐이고 그 사람도 온전하게 가지고 있지 않고 대부분 문제가 있거나 유실된 필름이 많다고 했어. 그 귀한 걸 평범한 일본 사람도 아닌 한국의 누군가가 가지고 있다는 건 그야말로 대발견이야. 만약 온전한 비디오 하나라도 구해서 공개하면 전 세계의 <도라에몽> 팬들의 입이 떡 벌어질 거야.”

  김칫국 한껏 들이킨 스노하라에게 나는 찬물을 뿌렸다.

  “그런데 네가 한국 오기 직전에 알려준 금정구 비디오방 말이야, 거기 문 닫았어. 거짓말 아니고 지도 검색해보고 하는 말이야.”

  스노하라는 당황해 마시던 커피를 못 넘기고 말문이 막혔다가 힘겹게 넘기고 입을 떼었다.

  “비디오방이 폐업했다면... 좋아! 그럼 행인들 붙잡아서 비디오방 주인의 인적 사항을 알아내보자. 어때 괜찮지?”

  “그건 민폐잖아.”

  “어쩔 수 없잖아. 친구니까 도와줘 지우상. 맛있는 음식 내 돈으로 사줄 테니까 제발.

  맛있는 음식이라... 그런데 일본인이 부산 지역 맛집을 알긴 알려나? 스노하라는 유학생 시절 서울과 인천만 다녀봤을 텐데... 이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스노하라가 내 손을 붙잡았다.

  “우리 비디오 주인 찾을 때까지 함께 다니자 지우상.”

  간절한 목소리. 흥분이 느껴지는 스노하라의 얼굴. 정에 약한 나는 스노하라에게 굴복해 한동안 동행하기로 약속해 줬다.

  “스노하라, 부산 금정구를 가려면 여기 근처 지하철을 타야 해.”

  “오 한국의 지하철! 흥분된다!”

  정말 알 수 없는 친구다. 모든 일본인이 이렇진 않겠지? 이런 생각을 하고 지하철을 타기 위해 카페에서 나온 우리는 곧장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스노하라의 캐리어가 덜덜거렸다.

  “안에 쓸데없는 물건 안 챙겼겠지?”

  “오브 콜스!”

  스노하라가 무척 신나게 외쳤다. 어지간히 기대하나 보다. 나는 스노하라가 비디오를 못 찾아서 우울해질까 봐 걱정됐다.

  부산 금정구 서동에 도착할 동안 지하철 안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바깥의 더운 공기도 습기로 데워진 내 몸과 마음을 상쾌하게 식혀주었다. 그러나 지하철에서 내리자마자 다시 뜨겁고 답답한 공기가 우리를 맞이해줬다. 지하철역을 나오자 아스팔트는 고기 불판처럼 지글지글 거리고 있었다. 나는 비디오고 뭐고 어서 탈출하고 싶었다. 길거리에서 택시를 세워 스노하라와 함께 택시를 탄 나는 목적지가 서동이라 말했다. 택시 기사가 서동 어디를 말하는 건지 내게 물었다. 이건 예상 못 했다. 나 부산 사람이 아니지 참... 내가 망설여 대답을 못하자 택시 기사가 말했다.

  “일단 서동까지 태워줄 테니 그때 가서 내릴 곳을 말해주세요.”

  그거 좋네. 기사님이 현명하고 순하신 분이어서 다행이지 만약 성깔 안 좋은 기사를 만나면 더운 날씨 속에 서로 짜증이 나 말싸움으로 번지거나 쫓겨날지도 모를 판이다.

  택시가 오르막길을 오른다. 나는 차 밖을 구경했다. 간판이 녹슬고 찢어져 있는 오래된 건물들이 좌우에 밀집해 있고 도로마다 빼곡히 주차된 차들이 눈에 띈다. 지금처럼 더운 날 이런 곳에 있으면 숨이 턱 막힐 것 같다. 이렇듯 나는 부정적인 의미의 쓸데없는 생각을 되뇌었다.

  “여기가 서동인데 어디서 내릴 거요?”

  기사님이 말했다.

  “벌써 서동인가요? 그럼 여기서 내릴게요.”

  택시비는 내가 냈다. 문을 열고 나가면서 감사합니다 한마디를 했다. 스노하라도 어설프지만 감사의 인사를 한국말로 했다. 택시를 보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방이 열기로 가득 찼다. 바람조차 들어올 수 없게 막은 밀집 건물과 자동차 매연이 살인적인 더위를 만들어냈다. 어쨌든 스노하라가 찾는 서동에 도착했다. 이제 문제의 비디오방의 흔적을 찾아야 한다.

  “지우상, 여기가 서동 맞지?”

  “택시 기사 아저씨가 서동이라 했으니 서동이겠지.”

  나와 스노하라는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땀이 조금씩 떨어지고 있다. 스노하라는 얼른 찾고 싶어 흥분된 표정을 지었다. 기대하면 실망도 큰 법인데 못 말린다. 내가 스노하라를 걱정하는 사이 스노하라는 길 가던 행인 한 명을 붙잡고 물어봤다.

  “여기... ‘부엉이 비디오’ 어디...?”

  행인이 외국인을 만나 난색을 보이자 내가 끼어들었다.

  “죄송해요. 이 친구가 일본인이라 우리나라 말은 좀 서툴러요. 그러니까 이 친구가 아저씨에게 말하려 했던 건 여기 서동에서 ‘부엉이 비디오’라는 가게가 어디 있는지 물어보는 거였어요. 혹시 아세요?”

  행인이 말했다.

  “비디오방 사라진 지 10년이 훨씬 넘었는데 이제 와서 없어진 비디오방을 찾아요? 희한하네. 저기로 30분 정도 쭉 직진하면 서점 있거든요? 거기가 옛날 ‘부엉이 비디오’ 있던 자리에요.”

  뜻밖의 이득이다. 위치는 알았는데 내가 확인한 대로 비디오방은 문을 닫았고 다른 가게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스노하라가 궁금해하자 나는 행인이 말한 그대로 스노하라에게 설명했다.

  “일단 가보자 지우상. 혹시 모르잖아 응?”

  이런 반응 나올 줄 알았다.

  “젊은 사람이 비디오를 왜 찾아요?”

  “검색하다가 귀한 게 있다길래 찾고 있어요.”

  “그래요? 잘 찾아보세요.”

  행인이 다시 제 갈 길을 갔다. 우리는 잠시 꿀 먹은 벙어리처럼 서있었다. 가긴 가야겠는데 막상 발을 떼려 하니 비디오방이 없어져 흔적이 있을 가능성이 없으니 가기가 싫어진다. 게다가 무척 덥다. 일단 가보자는 스노하라도 나도 그저 앞을 멍 때리며 길게 늘어선 이글거리는 도보를 쳐다봤다. 한참만에 스노하라가 입을 열었다.

  “가자 지우상. 비디오방 있던 곳으로.”

  “정말 갈 거야? 너 책 사러 일본에서 한국 온 게 아니잖아.”

  “그래도 가보자. 단서라도 있지 않겠어?”

  단서? 나는 속으로 비웃었다. 서점에서 <도라에몽> 비디오를 찾아본다? 한글판 만화책 구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앞장 설게 지우상.”

  스노하라가 앞장서서 서점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나는 멍 때리다 스노하라와 멀어진 걸 알아채고 부랴부랴 뛰어가 합류했다. 서점이 비디오 찾는데 무슨 도움이 될까? 헛된 희망이야 스노하라. 우리 그냥 관두고 온 김에 부산 여행이나 하자.

  하지만 나의 마음을 모르는 스노하라는 땀이 송골송골 맺힌 채 서점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나는 더위 때문에 점점 뒤처졌다. 스노하라가 먼저 도착해 손가락으로 서점을 가리켰다. 뒤늦게 도착한 나는 스노하라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서점 간판을 보았다. 도저히 비디오가 없을 것 같은 일반적인 서점이다. 나는 돌아가자고 말하려고 스노하라의 팔을 잡으려 했으나 스노하라는 잽싸게 서점 안에 들어갔다. 아스팔트 열기와 더운 공기에 지친 나도 일단 스노하라를 따라 서점에 들어갔다. 서점에 들어서자 에어컨이 내뿜는 냉기와 시원한 공기 덕분에 눈부신 천국을 맛보는 것 같았다. 작은 의자를 발견한 나는 의자에 앉았다. 바깥의 더위에 시달렸기에 이곳에서 한참 쉬었다 가고 싶어졌다.

  “여기가 비디오방... 맞나요?”

  스노하라가 어설픈 한국어로 나이 든 점원에게 물었다.(나중에 알았는데 점원이 아니라 점장이었다.) 점원은 이해 못 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스노하라 역시 자신이 제대로 한국말을 못 해서 곤란해하고 있었다. 떨어져 앉아 쉬고 있던 내가 스노하라가 말을 못 해 끙끙대는 걸 보고 불쌍해서 나섰다.

  “이 친구가 일본인이라 한국말 잘 못해요. 제가 대신 물어볼게요. 혹시 여기가 예전에 ‘부엉이 비디오’가 있던 가게 맞나요?”

  점원은 고민되는 표정을 지으며 한참 대답을 못 했다. 아무래도 이 사람은 잘 모르는 것 같다.

  “모르겠네요. 서점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잘 모르겠어요.”

  “건물 주인이라도...”

  스노하라가 입을 열었다.

  “건물주라도?”

  나는 살짝 당황했다. 스노하라, 갑자기 건물주 얘기를 왜 하는 거야? 곤란하게.

  “건물주님 전화번호는 알아요.”

  “정말요?”

  스노하라가 한국말을 알아듣고 미소를 지었다. 나는 이 상황이 황당했다. 이어 스노하라가 나를 보채자 내가 입을 열었다.

 “그럼 건물주님 연락처라도 알 수 있을까요? 이 친구가 찾는 게 있거든요.”

  점원은 내 말을 듣고 나서 포스트잇 한 장을 떼어 전화번호를 적어주고 나서 내게 건네줬다.

  “감사합니다.”

  이제 시원한 서점에서 나가야 한다. 문을 열자마자 다시 도로를 가득 메운 뜨거운 열기를 맛보게 되었고 나는 서점에 다시 들어가고 싶어졌다. 스노하라가 말했다.

  “어서 전화해보자!”

  녀석 흥분했네. 하기 싫지만 친구니까 어쩔 수 없지. 나는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점원이 가르쳐준 건물주 전화번호를 입력했다. 하지만 통화 버튼을 누르기가 좀 꺼려졌다. 괜히 바쁜 사람 건드려 욕 먹는 게 아닐까 말이다. 나는 한참 고민하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띠리링 띠리링... 내가 큰 잘못을 했나... 몸이 떨린다...

 띠리링 띠리링...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일단 해보자...

  “여보세요?”

  건물주가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혹시 서점 건물주님이시죠? 저희가 다름이 아니라 옛날 ‘부엉이 비디오’라는 가게 주인을 찾고 있거든요. 혹시 아시나요?”

  “제가 그 비디오방 주인이었는데요?”

  비디오방 주인이었다고?

  “그런데 젊은 사람이 무슨 이유로 제게 전화하는 거죠?”

  건물주가 내게 물었다.

  “말하기가 좀 뭣하지만 일본 N본부 <도라에몽> 비디오 아직 소장 중이신가요?”

  “<도라에몽>요?”

  “네, <도라에몽>요. 만화영화인데 파란색 고양이 나오는 만화.”

  나는 이런 말 하는 게 부끄러워 횡설수설했다. 건물주가 입을 열었다.

  “본지 오래되었는데... 아마 가지고 있을 겁니다. 아버지 유품이라 안 버리고 소장 중이거든요.”

  어라? 이 만화 같은 전개는 뭐야? 가지고 있다니? 나는 만화 같은 우연의 연속에 기가 찼다. 스노하라가 말했다.

  “지우상, 가지고 있대?”

  “어, 보관 중이래.”

  스노하라가 내 말을 듣고 몹시 흥분에 빠졌다.

  “비디오가 보고 싶어요?”

  “사실 일본인 친구가 비디오를 찾고 있거든요. 전 도와주는 중이고. 혹시 볼 수 있을까요?”
 침묵... 갑자기 불안감이 밀려왔다.

  “문자로 주소 알려줄 테니까 지금은 안 되고, 이번 주 일요일에 오세요. 토요일까진 제가 일을 해서 시간이 안되거든요.”

  볼 수 있다. 스노하라가 그토록 찾는 물건이자 일본 본토에서도 못 본다는 N본부 <도라에몽> 비디오를 대한민국 부산에서 볼 수 있다. 판타지 만화 같은 전개.

  “스노하라, 건물주 아저씨가 우리 보고 일요일에 찾아오래. 네가 그토록 찾던 <도라에몽> 비디오 보여주겠데.”

  “정말? 우와! 일본에서도 못 보는 걸 한국에서? 기대된다!”

  스노하라는 생에 가장 큰 선물을 받고 기절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녀석은 너무 흥분해서 자기도 모르게 일어가 튀어나왔다.

  “일단 숙소부터 잡자. 그리고 주소는 문자로 알려준다고 했으니까 오늘 푹 자고 당분간 부산 여행 좀 하다가 일요일에 건물주 아저씨를 만나보자고.”
 신기한 하루였다. 우리가 찾는 걸 손쉽게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 일요일이 되면 <도라에몽>을 볼 수 있다. 나는 관심 없지만 어쨌든 본국에서도 못 본다는 귀하디 귀한 물건인지라 건물주와 통화한 이후 약간의 기대심이 생겼다. 이제 잠잘 곳이나 찾아봐야지.

  일요일. 여기는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진동. 건물주 아저씨가 말한 주소다. 스노하라와 나는 큰 주택 대문 앞에 서서 머뭇거렸다. 딱 봐도 돈 많아 보이는 넓은 마당이 딸린 주택의 대문 앞에 서니 벨을 누르기 두려웠다. 게다가 생판 남을 보러 가는데 선물 없이 맨손으로 방문하기엔 허전하고 좀 미안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말했다.

  “스노하라, 잠깐만 기다려. 작은 선물이라도 사 와야겠어.”

  나는 말을 마치고 즉시 편의점을 찾아 달렸다. 동네 편의점은 15분 거리에 있었는데, 전속력으로 질주하니 10분도 안 되어 도착했다. 달린 후 지친 숨을 내쉬며 나는 편의점에 들어가 과일 음료수 세트를 구매했다. 돌아가는 길은 천천히 걸어갔다. 주변을 구경했다. 으리으리하고 깨끗하고 정돈 잘 된 마당 딸린 주택들이 즐비한 동네였다. 건물주니까 돈이 많아서 이 동네에 사는 거겠지? 나는 문득 부러워졌다. 좁은 아파트와 낡은 기숙사에서만 살았는데 돈 많이 벌어서 잔디 깔리고 정돈 잘 된 주택에 살면 얼마나 향기롭고 쾌적하며 행복할까. 해방감까지 느껴지겠지. 부럽다 부러워.

  내가 돌아왔을 땐 대문이 벌써 열려 있었다. 그새를 못 참고 벨을 눌렀구나 스노하라... 스노하라는 건물주로 보이는 탈모가 심하게 온 나이 든 아저씨와 대화하고 있었다. 나는 그 광경을 보고 뛰어갔다. 선물을 끼고 헉헉거리며 대문에 도착한 나는 먼저 스노하라에게 눈치 없게 왜 가만히 안 있고 벨을 눌렀냐고 따졌다. 스노하라는 심심해서 눌러보았는데 바로 아저씨가 나왔다고 해명했다. 아저씨가 나를 보고 친구냐고 물었다. 스노하라가 말했다.

  “대학교 친구... 친한 친구요...”

  이어 내가 대답했다.

  “죄송해요. 스노하라가 좀 참을성이 없는 친구라서...”

  아저씨가 웃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심심해서 티브이 리모컨이나 끄적거리던 참이었는데 오랜만에 집에 손님이 오니 오히려 반갑네요.”

  “아하하... 송구스럽습니다.”

  “날씨가 더우니 어서 제 집에 들어오세요. 저 밖에 없으니까 긴장할 것 없습니다. 자, 어서요.”

  아저씨가 자신의 집으로 들어오라 손짓하였다. 매우 밝은 표정이었다. 나와 스노하라는 아저씨 말대로 집 안에 들어갔다.

 아저씨의 집에 들어서자 주말 연속극 속 부유층 집안 거실이 생각나는 깨끗하고 깔끔한, 그러면서 넓은 거실이 가장 먼저 눈을 사로잡았고 이어 비싸 보이는 소파, 탁자가 눈에 띄었다. 벽지는 보라색 꽃무늬로 꾸며진 흰색 벽지인데 장인이 땀 흘려 만든 전통 한지처럼 몹시 고급스러워 보였다. ‘드라마가 완전히 판타지는 아니었구나...’ 이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스노하라가 내게 말했다.

  “지우상, 음료수 상자 왜 사 왔어?”

  “아, 맞다.”

  스노하라가 지적하자 뒤늦게 선물로 사 온 음료수 상자의 존재를 깨닫고 서둘러 아저씨에게 선물로 드렸다.

   “뭐 이런 것까지야 허허.”

  나는 주변을 훑어보았다. 1층에 방이 세 개이고 멀리 보이는 욕실은 대충 봐도 넓어 보였다. 그리고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다. 아저씨가 입을 열었다.

  “먼 곳에서 오셨는데 먹을 것 좀 갖다 줄 테니 여기 소파에 앉아 에어컨 바람 쐬면서 좀 쉬세요.”

  주인아저씨가 소파에 앉아 쉬라고 하시니 더위에 지친 나는 즉시 푹신한 소파에 앉았다. 내 침대보다 안락한 소파였다. 하지만 아저씨 말을 잘 못 알아들은 스노하라는 그냥 기다려라고 해석해 소파를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 나는 아저씨가 소파에 앉아 쉬라고 말씀하셨다고 알려줬고 그제서야 스노하라는 소파에 앉아 세상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저씨가 부엌에서 참외를 조각으로 잘라 가져왔다. 나와 스노하라는 감히 입을 대는 게 눈치가 보여 차마 포크를 들지 못했다. 주인아저씨가 계속 권유하자 그제서야 한 조각씩 집어먹기 시작했다. 아삭한 참외를 어느 정도 먹은 후, 내가 아저씨에게 물었다.

  “얼마 전 전화로 말한 N본부 <도라에몽> 말이죠... 정말 소장 중이신가요?”

  “아직 가지고 있을 겁니다. 오래된 비디오라 지금도 재생될지는 모르겠지만요. 일단 저와 같이 창고에 가봅시다. 아버지께서 생전에 수집한 비디오들을 안 버리고 창고에 보관하고 있거든요. <도라에몽> 비디오도 아버지가 일본 다녀오시면서 가져오셨습니다.”

  아저씨는 참외 한 조각을 집어 먹은 후 우리를 데리고 창고로 들어갔다. 창고는 몹시 어두웠다. 아저씨가 불을 켰으나 오래되고 먼지 쌓인 싸구려 전등인지라 안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아저씨가 플래시를 켜고 창고 안 상자를 뒤지기 시작했다.

  “옛날 비디오에 관심 있으시면 여러분도 상자 한 번 뒤져보세요. 진귀한 비디오들을 볼 수 있을 겁니다.”

   아저씨가 은근히 자랑하듯 우리에게 상자를 열어볼 것을 권하였다. 스노하라가 못 알아들어 내게 묻자 나는 상자를 뒤져보라고 하셨다고 말했다. 스노하라는 내 말을 듣고 나서 상자를 뒤지기 시작했는데 얼굴에서 기대에 찬 미소가 보였다. 나도 상자를 뒤져보았다.

  한 상자를 열어보았다. 상자 안에는 제목이 한자와 일어로 된 비디오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해석해봤다. 홍백... 가합... 전? 내가 읽은 게 맞는 건지 긴가민가해 옆에서 상자를 뒤지고 있는 스노하라에게 이 비디오 제목이 일본 TV 프로그램 <홍백가합전>이 맞는지 물어보았다. 스노하라는 한 번 쓱 보더니 <홍백가합전>이 맞다고 대답했다. 덤으로 그 비디오는 <홍백가합전> 15화라고 덧붙여 말했다. 나는 의문이 들었다. 왜 <홍백가합전> 비디오가 한국의 가정집 창고에 있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좀 더 뒤져보니 이번엔 N방송사 대하드라마라는 커다란 글씨가 적힌 비디오를 발견했다. 제목을 천천히 해석해보았다. <봄의 언덕>... 아버님이 일본사를 좋아하시는 분이셨나? 나는 스노하라에게 방금 발견한 대하드라마 비디오를 보여주었다. 스노하라는 면밀히 살펴보더니 살짝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유실된 드라마인데?”

  “유실? 사라졌다고?”

  “응. 몇 년 전 TV에서 봤어. <봄의 언덕>은 테이프가 유실돼서 N방송사에서 기증자를 찾고 있는 드라마야. 이런 게 한국에 남아있다니...”

  스노하라는 자신이 뒤지던 상자를 밀어놓고 내가 발견한 대하드라마 비디오를 꼼꼼히 살펴봤다. 몹시 신기하다는 눈빛이었다. 이어 내가 뒤지던 상자를 자신이 뒤져보기 시작했고 잠시 후 다른 N방송사 대하드라마 <꽃의 생애>, <천과 지> 비디오도 발견했다고 내게 말했다. 스노하라가 말하길 이것들도 일본에선 유실된 대하드라마라고. 나는 그런 장르에 관심이 없어 스노하라의 말을 대충 흘려 듣고 반대로 스노하라가 뒤져보던 상자를 확인해 봤다.

  비디오들을 꺼내 보니 확실하게 해석하진 못하겠으나 60~70년대 일본 코미디 프로그램 비디오들을 모아 둔 상자 같았다. 처음엔 왜 이런 게 있는지 이해를 못 했고 아저씨의 아버지께서 취향이 독특하시다고 생각했지만 상자를 계속 뒤져볼수록 점점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옛날 한국 방송계는 외국 방송 프로그램 표절 투성이었다고 여러 곳에서 많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 일본 코미디 프로그램 비디오들은 한국 코미디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한 표절의 대상이 된 비디오인가? 음... 표절이란 단어는 지나친 것 같다. 순화해서 연구하기 위한? 뻔뻔한데... 아무튼 용도가 수상한 비디오들이다.

  일본 코미디 프로그램 비디오를 여러 개 발견하고 나서 표절이 떠오르니 일본 대하드라마 비디오들도 의심 가기 시작했다. 드라마 역시 과거에 외국 드라마들을 무수히 많이 표절했다고 신문기사를 본 적 있다. 그러면 설마 이 비디오들도 드라마 표절할 때 사용된 비디오? 아까 발견한 일본의 <홍백가합전>도 우리나라 <전국노래자랑>이 표절했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박스를 뒤질수록 나는 스노하라에게 뻘쭘해지고 미안한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스노하라가 눈치를 못 채서 다행이지 만약 이 모든 게 방송 프로그램 표절용 비디오라는 걸 알게 되면 하루 종일 비웃을지도 모른다.

   “어? <도라에몽>?”

  스노하라가 급히 외쳤다. 나와 아저씨는 상자 뒤지기를 멈추고 스노하라에게 다가갔다. 스노하라는 매우 흥분한 상태였다.

  “지우상, 이거 <도라에몽>이라 적혀 있어! 우리가 찾던 게 아닐까?”

  내가 찬찬히 살펴봤다. 유성펜으로 휘갈겨 쓴 제목은 일본어로 큼지막하게 <도라에몽>이라 적혀 있고 작은 글씨로 한글로 제목을 다시 쓴 비디오였다. 1편 번호가 적혀 있었다.

  “아저씨, 설마 이게 스노하라가 찾는 비디오 맞나요?”

  내가 말했다.

  “여러분이 찾던 <도라에몽> 맞아요. 여기 깨알 같은 글씨 보이죠? N본부 1973년 1편. 여러분이 찾던 거네요. 비디오 가게 닫고 나서 상자에 넣고 보관한지 10년 하고도 훨씬 넘어서 저도 기억이 가물가물했는데 용케도 찾으셨네요.”

  아저씨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스노하라, 네가 찾던 비디오가 맞아.”

  스노하라는 두 팔을 높이 들며 부담스러운 오버액션를 취하며 만세를 여러 번 외쳤다. 오버액션 만세를 본 나는 괜히 부끄러워졌다. 아저씨는 계속 허허 웃기만 하셨다. 스노하라가 만세를 멈추고 상자를 다시 뒤져보았다. 스노하라는 상자 안에서 <도라에몽> 비디오를 연이어 발견해 하나씩 하나씩 꺼내 놓았다.

  “지우상, 우리 고생이 드디어 보상받는 순간이야! 여기 이 상자에 N본부 <도라에몽>이 여러 편 있어! 숫자가 적힌 대로 꺼내보는 중인데 전편이 있는 것 같아! 너무 흥분돼!”
 전편이 있다고? 일본에서도 없어서 못 보는 걸 대한민국의 한 아저씨가 전편을 가지고 있다고? 이 아저씨 집안은 옛날에 뭐 하던 집안이야?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저씨 집 창고 탐방은 <도라에몽> 비디오를 발견한 후 서둘러 끝났다. 아저씨는 창고 한 켠에서 먼지 쌓인 비디오 플레이어를 꺼내 창고 밖에 내놓고 깔끔하게 닦았다. 이어 나와 스노하라를 불러 같이 텔레비전를 옮기자고 도움을 요청하셨고 우리는 아저씨를 도와 텔레비전을 창고 밖으로 꺼냈다. 오래되어 먼지가 가득 쌓였고 무게도 엄청난 골동품 수준의 텔레비전이었다.

  “저는 텔레비전 선을 찾아야 하니까 여러분이 고생 좀 해주셔야겠어요. 텔레비전을 저기 2층 작은방으로 옮겨주세요. 파란 색깔 침대가 있는 방으로요.”

  아저씨는 우리에게 텔레비전 옮기기를 부탁하고 선을 찾으러 다시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나와 스노하라 둘이서 무거운 텔레비전을 들고 조심조심 2층으로 옮겼다. 워낙 무거워서 다리가 휘청거렸다. 계단을 밟을 때마다 실수로 떨어뜨릴까 봐 식은땀이 났다.

  힘겹게 올라온 2층은 1층만큼 넓었고 침실로 보이는 방 두 개가 있었다. 우리는 아저씨가 말한 대로 파란 색깔 침대가 있는 작은방을 찾아 빈자리에 텔레비전을 놓았다. 스노하라가 힘들어서 침대에 앉았다. 나는 서서 숨을 고른 후 스노하라에게 물었다.

  “스노하라. 만약에 비디오가 제대로 재생되지 않으면 어떡할 거야? 비디오는 가만히 두기만 해도 화질이 열화 되거나 망가진다고 들었거든.”

  스노하라는 자기의 고생이 이제 와서 헛수고가 되길 원치 않았는지 내 말을 부정했다. 자신의 탐방이 비디오 재생 불가로 끝이 나는 걸 전혀 원치 않았다. 스노하라는 다 된 밥에 재 뿌리지 말라며 내 입을 막아버렸다.

  우리가 비디오 문제로 반쯤 진심 담아 티격태격하는 사이 아저씨가 <도라에몽> 1편 비디오와 복잡하게 뒤엉킨 검은 선들 그리고 비디오 플레이어를 들고 작은방에 올라오셨다. 우리는 조용해졌다. 아저씨는 티격태격하다 갑자기 입 씻고 조용해진 우리가 웃겼는지 살짝 미소를 보였다. 그리곤 텔레비전을 콘센트에 연결했다. 이어서 비디오 플레이어를 콘센트와 연결하고 뒤엉킨 선을 풀어 텔레비전과 연결했다. 이 모든 과정을 한 치의 머뭇거림 없이 척척 연결하는 모습이 분명 단순한 선연결에 불과한데도 몹시 대단해 보였다. 연결이 끝나자 아저씨는 1층 창고에서 가져온 <도라에몽> 1편 테이프를 집어 비디오 플레이어 투입구에 넣었다.

  이제 운명의 시간이다. 스노하라의 탐방의 결과가 정해지는 순간... 텔레비전은 오랜만에 전원이 들어와서인지 지지직 소리가 연발했다. 이 일이 하기 싫었던 나도 막상 비디오를 재생하니 괜히 기대가 되었다. 나는 스노하라를 쳐다보았다. 스노하라는 침을 꼴깍 삼키며 긴장하고 있었다.

  "빰 빠밤 빠밤 빠밤밤밤밤 밤밤밤~"

  나왔다. 오프닝 영상이 나왔다. 스노하라의 표정에서 긴장이 풀리고 미소가 보이기 시작했다. 트럼펫으로 연주한 것 같은 전주가 끝나고 일본어 노래 가사가 나오기 시작했다.

  “히야~ 아- 아아 아-! 보쿠노 도라에몽...”

  일어로 된 오프닝 주제가가 흥겹게 흘러나오고 스노하라가 그토록 찾던 <도라에몽>의 주인공 도라에몽이 천진난만하게 도로를 걸으며 만화 속 등장인물들을 경악에 빠뜨리는 장면들이 연이어 나왔다. 스노하라는 신나게 가사를 흥얼거렸다. 오프닝이 끝나고 다음엔 스폰서 영상이 나왔다. 스폰서 안내가 끝나자 드디어 만화 본편이 나오기 시작했다. 스노하라는 집중해서 감상하기 시작했다. 지각하는 노비타! 선생님께 혼나는 노비타! 숙제를 하다가 갑자기 책상 서랍에서 도라에몽이 등장! 스노하라는 중계하듯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나는 이제 할 일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아저씨를 따라 1층으로 내려갔다.

  1층 거실 소파에 앉은 나는 스마트폰을 보며 무의미하게 시간을 때웠다. 아저씨도 1인용 소파에 앉아 스마트폰을 보고 계셨다. 아까 창고에서 비디오를 찾으며 든 생각을 아저씨께 말하고 싶은데 감히 말했다가 집에서 쫓겨날 것 같아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나는 생각 좀 하다가 안 위험한 질문을 아저씨에게 던졌다.

  “아저씨, 창고에 있던 비디오들 일본 TV 프로그램들이 많던데 어떻게 수집하신 건가요?”

  “그 비디오들? 제 아버지가 일본어를 잘하시고 일본에 다녀오는 일이 많았어요. 방송국 직원이었거든요. 일본 출장 다니기도 했고 개인적으로 자주 다녀오기도 하셨는데 돌아오실 때마다 비디오를 항상 한가득 가져왔죠.”

  “자주 일본에 가시려면 돈이 많아야 할 텐데.”

  “이런 말 제 입으로 하기 조금 부끄럽다만 저희 집이 대대로 부자예요. 할아버지 때부터 부자였다고 생전에 아버지가 얘기했죠. 아버지 말로는 할아버지께서 일본어를 열심히 배우고 일본인과 친해지니 부자가 되더라고 둘러대셔서 할아버지가 무슨 일로 부자가 됐는지는 잘 모른답니다.”

  일본어를 열심히 배우니까 부자가 됐다? 어떻게? 설마 친일 활동은 아니겠지? 이건 너무 막 나간 생각 같다. 나는 질문을 이어갔다.

  “그러면 일본 방송국에서 비디오를 회삿돈으로 구매해 귀국한 거예요?”

  “회삿돈도 썼고 아버지가 일본 방송이나 영화를 무척 좋아하셔서 시간 내서 개인 녹화 하시거나 일본에 살던 삼촌과 지인들을 통해 녹화된 비디오들을 가져오셨죠. 방송국에서는 그런 우리 아버지를 무척 좋아하셨어요.”

  “왜요?”

  “TV 방송 프로그램 만드는데 큰 도움이 되었거든요. 학생도 알다시피 과거 일본은 우리보다 훨씬 잘 사는 선진국이었잖아요. 그에 비해 우리는 딱히 기반 같은 것도 없고... 방송국에서 뭔가를 만들려면 경험이나 공부가 필요한데 방송 제작에 도움이 될 자료가 한국엔 하나도 없었고 그걸 외국에서나마 구할 수 있었던 사람이 저희 아버지뿐이셨죠. 아버지가 일본 다녀오시면서 많은 일본 텔레비전 프로그램 비디오를 가져오셨는데 그게 한국 텔레비전 프로그램 만드는데 큰 도움이 됐답니다. 언제인지는 기억 안 나는데 그 일로 방송국에서 표창도 받았어요.”

  아저씨는 은근히 자랑스러워하는 말투로 아버지의 활약을 회상했다. 하지만 내겐 자랑스러운 일로 보이지 않고 도둑질로 느껴졌다. 스노하라가 옆에서 이 말을 들었으면 무슨 생각을 했을까? <도라에몽>에 정신 팔려 이 자리에 없는 게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께서 일본어를 잘하셨나 봐요?”

  “현지인 수준이었죠. 어린 시절 일본에 꽤 오랫동안 사셨고 그곳에서 장사하셔서 돈도 많이 벌었으니까. 그래서 친척들도 일본에 살았죠. 아버지가 방송국에서 일본 TV 프로그램 가져오신 후 손수 해석하면서 관계자들에게 내용 설명하시고 번역 일도 도맡았습니다.”

  “아저씨는 일본어 할 줄 아세요?”

  “조금? 아버지가 저희 형제에게 일본어를 가르치고 대학도 일어학과로 보냈죠. 전 큰 관심 없어서 대학 생활 대충 하다가 사진 촬영에 푹 빠졌습니다. 지금 제가 하는 일이 사진관 일입니다.”

  “그렇군요.”

  좀 의외의 사실이다. 넓은 주택에 대대로 부자라는 사람이 지금 하는 일이 사진관 운영이라니. 본인이 좋아하는 일이고 사진관이 범죄도 아니니 더 이상 따질 건 없었다. 나는 비디오의 사용처에 대해 물어봤다.

  “아까 창고에서 일본 코미디 프로그램 비디오를 발견했는데 그러면 한국 코미디 프로그램 만드는 데 도움이 됐겠네요?”

  “일본 코미디 프로그램 비디오는 방송국 스태프와 코미디언 모두 환영한 물건이었죠. 재밌는 개그를 쉽게 짤 수 있었으니까요. 아버지는 거기에 큰 보람을 느끼셨어요. 그리고 아버지께서 사극을 좋아하셔서 일본 사극 비디오도 많이 가져오셨습니다. 아버지가 사극 비디오를 많이 가져와 방송국에 보내니까 나중에 우리나라 사극의 품질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고 좋아하셨어요. 제가 어릴 때 사극 좋아해서 아버지와 같이 시청한 적 많아 기억합니다. 일본 비디오 덕에 좋은 사극 만들 수 있게 되니까 나중에 방송국에서 일본 방송국 따라 대하드라마를 편성하기 시작했죠. 김흥기씨가 나오는 대하드라마가 있어요. <대명>이었나? 제 기억으론 그게 K방송사 첫 대하드라마일겁니다.”

  더 안 좋은 사실을 이 자리에서 알게 되었다. 일본이 이런 식으로 우리나라에 도움이 됐다니 황당했다. 아저씨에겐 재밌는 추억일지 몰라도 내게는 어둡고 부끄러운 한국 방송국의 과거를 이제 더 이상 알고 싶지 않았다. 나는 화제를 돌려 <도라에몽> 비디오에 대해 물어봤다.

  “<도라에몽> 비디오는 도대체 어떻게 구하신 거죠?”

  “<도라에몽>요? 아버지가 일본에 오래 살다 보니 일본 문화를 좋아하셔서 자연스레 만화도 종종 보셨어요. 기억을 더듬어보자면 일본에 방문했다가 식당에서 <도라에몽>을 보시곤 꽤 재밌는데 한국에도 소개되면 좋겠다 싶어 일본에 사는 지인과 삼촌을 통해 녹화를 부탁하셨고 일본을 몇 번 왔다 갔다 하면서 <도라에몽> 전편 비디오를 구하는데 성공하셨죠. 이후 방송국에서 <도라에몽> 비디오를 보여주면서 이걸 방송하면 시청률이 좋을 거라고 말씀하셨대요.”

  “그럼 한국에서 방영까지 했어요? N본부 허락 없이 개인 녹화 비디오로?”

  “그건 아니죠. N본부와 접촉도 했는데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어요. 우리나라 방송국 관계자들도 왜색이 너무 심하다고 반대했대요. 결국 <도라에몽> 방영 계획은 취소되었고 비디오들은 아버지가 집에 보관하게 됐죠. 사실 <도라에몽> 말고도 아버지가 일본에서 가져온 비디오들은 방송국에 보여줬다가 잊힐 때쯤 몰래 집으로 도로 가져오셨습니다. 처음엔 비디오 수집이 일이었지만 나중에는 취미가 된 것 같아요. 아버지가 방송국에서 일한 건 80년대 후반까지였고 그동안 일본에 참 많이 다녀오셨습니다. 나중엔 일하러 가는 게 아니라 놀러 가는 것 같았어요. 만화 비디오도 많이 가져와 우리 형제에게 보여주시기도 했고 때론 일본 영화 비디오를 구해서 밤에 혼자 술 까서 마시며 감상하시기도 했죠.”

  일이 취미가 되었다니. 특이한 아버님이시다. 이 집안은 오랫동안 한국에선 금기였던 일본 매체를 돈 많은 능력자 아버지를 통해 접하면서 취미가 되고 여가거리가 되었다. 당시 한국인들은 꿈에도 모를 일이다.

  “아버지가 방송국 퇴사하신 후엔 부산으로 돌아와 비디오 가게를 여셨어요. 그게 지금은 없어진 ‘부엉이 비디오’입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엔 제가 가게를 물려받았죠. 그리고 아버지 유품 정리하다가 일본 프로그램 비디오들을 발견했고, 그중에 재밌겠다 싶은 것들을 추려서 비디오 가게에 진열했죠. 은근히 찾는 사람 많았습니다. 일본 대중문화 개방 이전인지라 그랬던 것 같아요. <도라에몽>도 그때 진열한 겁니다. 본 사람이 꽤 될 거예요. 대부분 성인들이었죠.”

  왜 N본부 <도라에몽>을 한국 비디오방에서 볼 수 있었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아저씨가 매니아들을 위해 진열한 거였다. 당시 일본 매체 매니아들은 극소수인지라 희귀한 물건은 군말 없이 빌려 봤을 테니까 소문이 없었을 테고 나중에 <도라에몽>이 우리나라에 소개되자 어린이들이 무작정 찾아와 빌려보곤 자기들이 찾던 <도라에몽>과 너무 달라서 기억에 남아 인터넷에 글을 쓴 것일 테다.

  “아저씨, <도라에몽> 비디오 더 봐도 될까요? 부탁해요.”

  스노하라가 2층에서 내려와 약간 불쌍한 눈빛을 띠며 물었다. 아저씨는 흔쾌히 허락하셨고, 스노하라는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어 밝은 미소로 <도라에몽> 비디오들을 왕창 가져갔다.

  “맞다. 스노하라는 단순히 N본부 <도라에몽> 보러 온 게 아니라 비디오를 구할 목적도 있어요. 그런데 아버님 유품이라면 함부로 주시긴 어렵겠죠?”

  나는 스노하라의 목적을 대신 말해주며 슬쩍 간을 떠보았다. 아저씨는 손을 턱에 대고 곰곰이 생각하셨다. 깊은 고민에 빠지신 것 같다. 나는 조심스럽게 다른 방법을 물었다.

  “비디오가 안 된다면 영상 변환해서 DVD에 담아주시는 건 어떤가요?”

  “영상 변환? 맞다. 우리 사진관이 비디오 영상 변환도 했었지. 학생 말 잘했어요. 이것도 인연이고 오랜만에 저의 긴 얘기 들어주셨으니 이왕 오신 거 <도라에몽> 비디오들 모두 DVD로 만들어 드릴게요. 아니다. 학생, USB 있어요? 있으면 차라리 거기에 담아드릴게요. 요즘 USB 가격도 저렴하게 1만 원 정도 하니까 무리는 아닐 겁니다.”

  스노하라, 네 목적 내 덕에 이룬 줄 알아. 아저씨는 이어 사진관 주소를 알려주며 내일 USB를 가지고 사진관으로 오라고 하셨다. N본부 <도라에몽>은 이렇게 생각보다 너무 쉽게 구하게 되었다.

  스노하라는 아저씨를 통해 N본부 <도라에몽> 전편을 USB에 담아 일본으로 귀국했다. 그리고 한 달쯤 지나 나에게 문자를 보냈다. 인터넷 링크였는데 열어보니 신문기사였다. 자신이 신문에 나왔다고 자랑할 생각이었나 보다. 기사 제목은 “40년 만에 한국에서 발견된 N본부 <도라에몽>!!” 일본인에겐 한국에 <도라에몽> 비디오가 남아 있다는 게 어지간히 충격이었나 보다. 나도 처음 발견했을 때 충격적이긴 했으니 그 마음 모르는 건 아니다. 이어 스노하라는 N본부 <도라에몽>을 다 감상한 후 USB 파일을 복사해 DVD로 만들어 경매 사이트에 올렸다고 전했다. 지금 경매 중인데 경쟁이 매우 후끈해 가격이 20만 엔까지 치솟았다고. 나는 코웃음을 치며 스마트폰을 껐다. 그리고 아저씨 집에서 들은 얘기들을 되새겼다. 스노하라가 왜 아저씨 집에 일본 방송 비디오가 많이 있었는지 몰라서 다행이다. 그냥 <도라에몽>만 신경 써서 다행이다.

 

10·18문학상 단편소설 가작 수상 소감

  신기합니다. 제가 이번 10·18 문학상에 응모한 단편소설이 가작으로 당선되다니 말입니다. 평소 독서를 느리게 하고 책의 내용을 잘 이해 못하는 편이라 소설 쓰기는 아직 자질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제 수준을 반신반의하며 도전했더니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이변이 일어났습니다. 아직 많이 부족한 제게 가작이라는 뜻밖의 귀한 상을 선정해주신 심사위원분들과 경남대학교에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어릴 적부터 뭔가를 써보는 것을 좋아했던 저는 나이를 먹을수록 단편소설을 집필해 인정받는 것이 하나의 목표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펜을 잡고 노트에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머리를 굴려보면 점차 막히기 시작하고 자연스레 펜을 놓기를 반복했습니다. “이러면 말이 안 되는데?” “그런 전개는 나한테 무리야” 저의 능력 부족에 따른 한계였습니다. 그리고 저의 가장 큰 문제점인 자신감이 없어서 그만두는 일도 부지기수였습니다.(가작 당선작도 이게 당선될 가치가 있는지 회의감을 품었습니다)

  이번에 당선된 제 단편소설은 비교적 막힘없이 술술 써 내려갔습니다. 내용도 보통 단편소설들은 어둡거나 무겁고 가라앉는 분위기의 칙칙한 느낌의 이야기가 많다는 생각에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 둘 다 가볍게 읽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그러면서 뭔가 생각할 거리를 던지는 내용으로 썼습니다. 여기에는 저의 평소 관심사가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다만 작품을 제출한 후 만화영화라는 소재와 가벼운 분위기 때문에 심사위원으로부터 유치한 작품으로 찍히지 않을까 많이 우려했습니다만 가작으로 당선되었으니 조금은 안심이 됩니다.

  당선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제 수준을 계속 의심했으나 가작 당선 후 약간의 힘을 얻었습니다. 다시 펜을 잡고 설정을 짜고 이야기를 구상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재밌는 이야기를 쓰고 싶습니다. 이번 기회가 제 진로에 새로운 도움닫기가 될 것이라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저의 창작을 응원해주신 노성미, 이재성 교수님께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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