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이, 직립한 나무와 숲과 함께 겨울의 내부를 향해 걸어가고 있다. 오래지 않아 사람의 간난(艱難)한 겨우살이는 점점 추워질 것이다. 이 계절 동안거에 든 산사 수좌나, 빈손 빈 몸의 겨울나무나, 나에게는 짙은 먹빛이 주는 느낌과 비슷하게 다가온다. 다들 깨달음을 구하는 자세이지 않은가.
일찍 자신의 잎을 모두 다 떠나보내고 침묵 선정(禪定)에 든 나무는 산사의 면벽한 수좌(首座)를 닮았다. 그래서 겨울나무의 색은 결가부좌(結跏趺坐)를 튼 침묵의 색깔이다. 그 침묵의 무게가 내 마음 바닥까지 묵직하게 내려앉는다. 말로써 찾아갈 수 없는 언어도단(言語道斷)의 침묵 안에, 나무가 가르쳐주는 피안(彼岸)이 있다. 무거워진 만큼 가벼워지는 깨달음 같은.
나무의 작별은 한 해마다 되풀이하는 일이다. 보기만 하는 나에게는 나무의 침묵이 해마다 더욱 무겁게 느껴진다. 이때쯤 북쪽에서 불기 시작하는 된바람은 나무를 연주하는 하늘의 차가운 손이 된다. 윙, 윙, 나무가 울면 바람이 따라 운다. 마침내 큰 산이 우는 저녁이 오면 외로운 사람들은 나무를 찾아가는 바람이 된다. 첫눈이 오든가 첫얼음이 어는 시간과 함께, 11월이 깊어 간다.
불가의 진언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은 ‘아미타불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다’라는 사람의 염원이다. 아미타불은 서방정토, 곧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불법을 설하는 부처다. 현실이 아무리 힘들지만 죽어서는 극락에 가겠다는 가난하고 춥고 배고픈 민초의 꿈이 저 진언에 담겨있다.
현실은 사람보다 나무가 극락 가기는 쉬울 것이다. 나무의 일생은 자신을 몽땅 다 내주는 공양이다. 배부른 사람이 오체투지로 닿을 수 없는 거룩한 부처의 시간을 찾아가는 수행을 나무는 알고 있다.
이유를 말하라면 ‘나무아미타불’에서 ‘나무’는 돌아가고 싶다는 범어(梵語)라는 예를 들 수 있다. 돌아가고 싶다는 나무는 ‘南無’(남무)라 쓰고 ‘나무’라 읽는다. 부처가 보리수나무 아래, 56억7천만 년 뒤에 올 미래불인 미륵은 용화수나무 아래 앉아 깨달음 얻는다. 나무 아래에서 성불은, 불가의 가르침이 나무와 연관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무 아래 편안히 앉거나 나무와 같이 당당하게 서보라. 나무가 읽어주는 시가 있어, 그 시를 두 귀로 듣는다면 나무와 함께 걸어갈 수 있는 깨달음을 얻을 것이니. 발이 없는 나무가 걸어가는 곳, 그곳이 아미타불의 나라일 수도 있고, 행복의 나라일 것이라 믿는다.
나무에서 배워라. 나무는 위대한 인문 경전이며 철학 설법이다. 나무가 가르침이라면 나무가 모여 만드는 숲은 위대한 도량이다. 청년들이여, 나무에서 배우고 숲에서 깨달아라. 겨울이 혹독할수록 나무와 함께한다면 누구든 새잎 피우는 희망찬 봄이 빠르게 찾아올 것이니. 다 함께 나무의 노래를 듣고 나무의 노래를 부르자. 나무는 가르쳐주고 데려다줄 것이다. 청년이 꿈꾸고 원하는 그 나라로.
석좌교수·청년작가아카데미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