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부문 당선: 김수정(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3)
다다를 수 없는 마음
저녁을 먹다가 이모에게 말했다. 낮에 분리수거장에서 싸우는 노인들을 봤다고. 누가 버린 박스를 두고 서로 제 것이라 실랑이를 벌이더라고. 이모는 응, 하고 대답을 하면서 동시에 파래무침을 입 속으로 집어넣었다. 한 노인이 다른 노인을 때리기에 경비를 불렀다는 말에는 질문이 따라 붙었다. 네가? 응. 말하고 보니 괜한 얘길 꺼냈나 싶었다. 이인분의 식기 부딪히는 소리가 거실 겸 부엌을 단정히 메웠다. 노인들이 머리도 짧고 체구도 작아서 둘 다 할머니인 줄 알았는데, 때린 사람이 할아버지더라구. 이모는 갑자기 몸을 일으키더니 냉동실에서 살얼음이 낀 소주병을 꺼냈다. 경비가 와서 그 할아버지를 끌어내는데, 막 떠밀리면서도 끝까지 박스는 안 놓더라. 원래 그런 사람들이 더 독해. 그런 사람들? 그렇게 사는 사람들 말이야. 이모가 소주를 물컵에 따라 마실 때면 나는 언니가 느꼈던 감정을 어렴풋 알 것만도 같았다.
이모와 언니는 모녀지간임에도 꽤나 퍽퍽한 구석이 있었다. 반상회나 주민 모임에 나가면 사람들은 오히려 내 쪽을 가리키며 딸이라 부르곤 했으니까. 딸내미가 참 참하네. 시선이 집중되면 어린 나는 빈 요구르트 병을 빨다가 이모의 뒤로 숨어버리곤 했다. 이모는 사람들 앞에선 티내지 않았지만, 집에 돌아와 내 머리를 감기면서 한숨처럼 말을 흘렸다. 애정결핍도 아니고 왜 자꾸 그런 걸 빨아대니. 반면 언니는 반상회에 따라온 아이들과 격투기 놀이를 하다가 기어코 팔을 부러트리고 마는 쪽이었다. 이모는 계집애가 선머슴처럼 굴면 안 된다는 말을 꼭 밥상머리 앞에서 했고, 언니는 그럴 때마다 밥맛이 떨어져 자주 굶게 되는 것 같다고 나에게 털어놓았다.
그럼에도 이모가 내 나이에 혼자서 두 명의 아이를 키우기 시작했다는 걸 떠올리면 새삼 아득한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처음 이모와 살게 되었던 집은 방이 두 개였는데, 이모는 언니와 나에게 각자의 방을 내어준 뒤 정작 본인은 거실에서 지냈던 사람이니까. 머리가 크고 난 뒤 그때 왜 나에게 방을 내어주었냐고 묻자, 이모는 내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리모컨으로 채널을 휙휙 돌리며 말했다. 그냥 거실에서 티브이를 볼 수 있는 게 좋았다고. 나는 그런 이모의 무심함이 좋았다.
언니는 세 달 전 죽었다. 이모는 언니의 죽음을 꽤나 빠르게 수긍했지만, 그 방법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인정하지 못한 채였다. 하지만 아무리 부정해도 언니는 자살한 것이 맞았다. 경찰이 동반 자살 카페에 가입했던 언니의 인터넷 흔적을 찾은 것이었다. 그것에 대해서라면 내가 더 잘 알고 있었다. 언니는 재작년 겨울, 자살 카페에서 만난 사람들과 목포로 떠났다. 차 안에서 가스를 피워 죽으려는 계획이었으므로 차를 가져가야 할 사람이 필요했는데, 언니가 기꺼이 운전을 하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시동을 걸기 직전 언니는 나에게 문자를 보냈다.
나 오늘 교통사고 낼 것 같아ㅋㅋ
의미심장한 문자를 받은 뒤 몇 시간 째 연락이 닿질 않아 경찰에 신고를 했는데, 언니의 휴대폰에 위치 추적 알림이 떴다고 했다. 가족한테 문자 보냈어요? 진짜 죽고 싶은 마음이 있긴 했어요? 지금 당신이 우리한테 끼친 민폐를 생각해봐. 야 이 씨발. 죽고 싶어, 썅년아? 함께 자살하기로 한 사람들이 하나둘씩 원망의 말을 늘어놓다가, 급기야는 누군가 운전 중인 언니의 머리채를 쥐었다. 언니는 도로 한복판에 차를 세웠다. 언니는 내가 아닌 톨게이트 직원의 신고로 돌아오게 되었다.
닫힌 방문 너머로 이모가 설거지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방바닥에 아이돌 가수의 앨범을 두고 여러 각도로 사진을 찍어보다가, 문득 배경으로 보이는 싸구려 장판이 부끄럽게 느껴져 휴대폰을 내려두었다. 언니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발견한 싸인 앨범이었는데, 언니의 이름이 ‘혜준’이 아닌 ‘해준’으로 쓰여 있어 몹시 기분이 나빴다. 언니가 거금을 들여 싸인회에 다녀왔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더 그랬다. 그래서 인터넷 중고 장터에 게시글을 올렸다.
싸인 앨범 팝니다. 이름이 ‘해준’인 분께는 택배비만 받고 그냥 드릴게요.
반나절이 지나고 댓글이 달렸다. 마침 자신의 이름이 해준인데, 앨범의 실물을 꼭 보고 싶다면서. 나는 분홍색 차렵이불의 한 부분을 손으로 잘 펼친 뒤, 그 위에 앨범을 펼쳐 싸인된 부분이 잘 나오도록 사진을 찍었다. 몇 분 뒤 대댓글이 달렸다. 제대로 인증을 해달라며 내 아이디가 적힌 쪽지를 물건 위에 올려두고 다시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다. 파는 게 아니라 거저 주는 것인데도 까다롭게 구는 것이 영 성가셨다. 원하는대로 인증을 마치자 상대는 직거래를 원한다는 말과 함께 자신의 동네가 어디이니 가까우면 만나자는 댓글을 남겼다. 나는 자신이 사는 곳을 아무에게나 말할 수 있는 사람에 대해 생각하다가, 란아 드라마 할 시간이야, 밖에서 이모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거실로 나가니 이모는 이미 바닥에 이불을 다 깔아놓은 채였다. 아무 생각 없이 드라마를 보고 있는데도 찝찝한 기분이 가시질 않았다. 대뜸 만나자니. 아무것도 인증되지 않은 사람을 어떻게 믿고? 곱씹을수록 불쾌감이 솟구쳤다.
언니에게는 인터넷에서 만난 친구들이 많았다. 살아있을 때 나에게 분명 대학 동기, 스터디에서 만난 친구, 같이 일하다가 친해진 동생이라고 소개했던 사람들 모두가 인터넷 친구들이었다. 이모는 언니가 마냥 사교성이 좋은 줄 알았다. 언니는 종종 친구들을 집에 데려와 재우곤 했는데, 주로 콘서트가 늦게 끝난 날이나 음악 프로그램 방청을 위해 새벽부터 줄을 서야 하는 날이었다. 이모는 답지 않게 쭈뼛대다가 언니와 친구들에게 거실을 내어주었다. 이모는 자신이 사는 모양을 남들에게 보여주는 걸 싫어했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언니는 무감했다. 다들 이렇게 저렇게 사는 건데 왜 남들 눈치를 보냐면서. 이모는 언니의 그런 점이 선머슴 같다고 했다. 경찰에게 언니의 인터넷 기록을 받은 날, 젖은 머리를 말리지도 않고 티브이를 보던 이모는 한참동안 리모컨을 만지작대다가 물었다.
그 애들이 나쁜 애들 같진 않았어.
이모는 분명 언니를 죽인 사람이 따로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게 믿는 편이 차라리 편하다면 그대로 놔둘 생각이었다. 이모와 나는 드라마를 보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 불현듯 눈이 떠져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려는데 새로운 댓글을 알리는 푸쉬가 와 있었다. 그런데 혹시 탈덕하신 거예요? 잠결이라 그런지 헛웃음이 먼저 튀어나왔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변변한 직업을 가지지 못했다, 고 이모는 입버릇처럼 말했는데 그것이 결코 한탄조는 아니었다. 그냥 어떤 운명을 받아들이는 사람처럼, 물컵에 든 소주를 두어 모금씩 나누어 마시다가 중얼거리는 게 다였으니까. 이모는 우리를 키우면서 줄곧 은행 일을 하다가 언니가 경리로 취직한 뒤에는 일을 그만두었다. 그러다 언니가 죽고 마트 캐셔로 다시 일을 시작했는데, 그 일을 썩 좋아하진 않았지만 ‘마트 캐셔’라는 이름은 마음에 든다고 했다.
나는 수도권의 어느 영화학과를 졸업했지만 감독이 되기는커녕 촬영을 하려는 시도조차 않고 있다. 그래도 시나리오는 계속 쓴다. 가끔 대학 동기들의 촬영을 도와주는데, 이상하게도 현장을 발로 뛰다보면 나도 할 수 있을 것만 같고, 잘 될 수 있을 것만 같고. 그래서 몇 달 전 쓰다 만 시나리오에 대사를 덧붙이다가, 또 의욕을 잃고 노트북을 덮는 것이다.
요즘 내 시나리오에는 마트가 자주 나오는데, 아마 이모의 영향일 것이다. 사실 언니가 죽었을 때 가장 두려웠던 것이 바로 그런 나의 관성이었다. 살아있을 때 언니는 내 영화를 싫어했다. 왜 엄마의 얘기를 함부로 쓰냐면서. 다들 이렇게 저렇게 사는 거라며. 내가 반박하자 언니는 입만 아프다는 듯 나를 방문 밖으로 밀쳐내면서 말했다.
너 이러려고 우리집 들어왔니?
언니는 그 말을 내뱉은 이후 단 하루도 발을 제대로 뻗고 잔 적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발이 꺾인 채로 죽었나. 건물에서 떨어질 때 에어컨 실외기에 다리를 부딪쳤고, 그 때문에 장의사는 언니의 부러진 다리에 나무판자를 대고 끈으로 묶어 고정시킬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다리가 묶인 채 입관한 언니. 살아서도 발을 뻗고 잔 적이 없는 언니. 그런 언니를 떠올리면 이 집에 들어온 내가 정말로 하나의 화禍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여태껏 내가 일곱 살이 되던 해에 엄마가 죽었기 때문에 이모의 손에 키워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사실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엄마가 수원역 근처 노래주점에서 서빙을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걸 엄마의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지. 이모는 이제 엄마와 연락도 닿질 않는다면서 그런 말을 덧붙였다. 다들 이렇게 저렇게 살다가, 정말로 힘들면 그렇게 된다고.
이모가 출근하고서는 역 안의 편의점 앞에서 직거래 상대와 만났다. 해준 씨 맞으세요? 말을 내뱉고서야 언니의 이름과 같은 발음에 적잖이 놀라버렸다. 가장 익숙한데도 어쩐지 생경하다고 해야 하나. 보통은 언니를 ‘언니’라고 불렀지 이름으로 부르진 않았으니까.
벌새님이세요?
인터넷상의 닉네임으로 직접 불려보긴 처음이었다. 이런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나로서는 낯부끄러운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역시 다른 사람에게 팔아버릴 걸 그랬나. 해준을 만나기로 결심한 건 오늘 새벽 그가 보낸 쪽지 때문이었다. 고삼이라 아이돌 덕질하는 걸 엄마한테 걸리면 죽는다면서. 그러니 택배로는 절대로 받을 수가 없다고. 그게 좀 짠하기도 하고 귀엽게 느껴지기도 해서, 나는 수많은 해준 중 고삼 해준에게 앨범을 넘기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키가 큰 해준은 구부정한 자세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묘하게 들뜬 표정을 보아하니, 내가 저와 같은 류의 취미를 가지고 있으리라 짐작하는 듯싶었다. 껄끄러운 마음이 들어 돌린 시선이 해준의 올 나간 스타킹에 가닿았다. 그런 채로 몇 번이나 세탁을 한 듯 구멍 주변에 보풀이 일어나 있었다. 이번에는 내가 묘한 기분이 되어 해준을 마주했다. 미안하게도 내가 알아볼 수 있는 것은 그런 것들이다. 그러자 해준은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앨범을 중고로 사게 된 것에 대한 변명이었다. 이번에는 어쩔 수 없이 중고 거래를 하게 되었지만 자신은 ‘진짜 팬’이라며. 그러고는 대뜸, 언니, 하고 나를 불렀다. 언니. 저 멀리 전철이 역으로 진입하며 내는 굉음 속으로 두 음절의 단어가 빨려 들어갔다. 미안해요. 해준이 작게 중얼거렸다. 도대체 무엇이? 결코 이런 입장이 되고 싶진 않았다.
해준은 앨범이 든 종이 가방을 받고서는 자신의 백팩에서 네스퀵과 사탕 몇 개가 든 봉지를 나에게 건넸다. 택배비 대신 주는 거라면서. 역까지 함께 걸으면서는 왜 탈덕했냐며 은근한 책망의 눈빛을 보내기에, 무심코 언니가 팬이었다고 말해버렸다. 그러자 더 궁금해 하는 눈치였는데, 죽은 사람의 물건이라고 하면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찝찝할 것 같아 더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고삼이면 가뜩이나 미신이나 운 따위에 예민할 시기였으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갑자기 해준에게 진실을 말해야겠다는 충동이 일었다. 그러나 생각이 실행으로 옮겨지기도 전에 해준은 나와 반대 방향 전철에 몸을 실었다. 괜찮겠지. 언니는 사람에게 해를 끼칠 귀신이 못 된다. 다리도 묶여있고.
해준과 헤어지고서는 혼자 닭갈비를 먹으러 갔다. 요즘은 1인분을 시키면서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어 좋다. 알바생이 나를 4인석으로 안내했는데, 잠시후 사장이 와서는 2인석으로 자리를 옮겨달라는 부탁을 했다. 알바생이 일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렇다고, 이해를 좀 해달라고. 자리를 옮기는 것쯤이야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닌데 왜 부러 그런 말을 덧붙였을까.
이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알바생은 정말로 초짜가 맞는 듯했다. 옆 테이블의 남은 닭갈비에 밥을 볶고 있는 그녀에게로 사장의 잔소리가 계속해서 따라붙었다. 나는 알바생이 사장에게 또 한소리를 들을까 노심초사 하느라 무엇 하나 제대로 먹지 못했다. 내가 돈을 지불하고 얼마간 자리를 차지한 이곳이 누군가의 일터라는 것. ‘혜’를 ‘해’로 발음하는 것만큼이나 새삼스러웠다.
언니가 일하는 모습을 딱 한 번 본 적이 있다. 내가 대학 졸업반이고 언니는 막 구직을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언니는 디지털 플라자의 개업 기념으로 입구에 마련된 상판에 올라가 호객 행위를 했다. 대형 스피커에서 유행이 지난 댄스곡이 흘렀고, 언니는 치어리딩복 같은 옷을 입고 춤을 췄다. 시내 한복판에서. 나는 건너편 신호등에서 언니가 춤추는 모습을 무작정 지켜보다가 서둘러 발길을 돌렸다. 언니가 하는 일이 부끄러웠던 것은 결코 아니다. 그렇다기보단 언니가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괴로웠지. 우리 집안은 대대로 변변한 직업을 가지지 못했다, 고 이모가 입버릇처럼 말하던 것이 떠올라서. 변변한 직업이란 건 흔히들 떠올리는 노동의 형태와 가장 멀리 떨어진 것이니까. 그리고 그 사실에 대해 언니와 나는 이모처럼 마냥 달관할 수 없었다. 우리는 남들과 달리 특별하게 살 수 있을 거란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그 믿음에는 꼭 ‘언젠가’라는 조건이 붙었다. 때로는 어떤 막연함이 우리를 살게 만드는 것 같았다. 십 년쯤 뒤엔 우리도 뭔가가 되어 있겠지, 지금과 다르게 살고 있겠지, 하고.
언니는 그렇게 해서 번 돈의 절반을 아이돌에 썼다. 콘서트 티켓만 해도 십만 원 안팎인데다 그 외에도 굿즈니 뭐니 자잘하게 들어가는 돈이 많았다. 이모와 언니는 그 일로 자주 부딪혔는데, 우리 가족은 언제나 한 푼이 아까운 상황이니 나 또한 이모를 편들 수밖에 없었다. 크게 싸우고 한 달간 말을 섞지 않은 적도 있었다. 아이돌을 위해 모금 활동을 시작할 것이라는 언니의 말이 화근이었다. 생일 기념으로 지하철에 광고판을 달아줘야 한다면서. 나는 그때 처음으로 언니를 언니의 이름으로 불러보았다. 박혜준 너 정신 좀 차려라, 걔는 강남 산다며, 30억짜리 건물도 있다며, 모금은 우리가 받아야 할 판이라고. 내 말을 이모가 옆에서 거들었고, 구태여 하지 않아도 되는 우리 집안의 사정 따위를 구구절절 늘어놓기 시작했다. 언니는 뭐라 반박도 하지 않고 가만가만 이모의 잔소리를 듣다가 출근했다. 말을 엎지르고 보니 미안한 마음이 들긴 했지만 못할 말을 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모는 마트에 출근하고서부터 친구가 생겨 좋다고 했다. 그곳의 젊은 직원들이 자신을 ‘여사님’이라 불러주는 것도 마음에 든다고 했다. 그렇지만 가끔 듣는 ‘아줌마’라는 말도 괜찮은 것 같다고 했다. 쉰 넘으면 할머니 소릴 들을 줄 알았다며 제법 우스갯소리를 할 줄도 알게 되었다. 이모가 화장을 지우는 동안 나는 부엌 겸 거실에 이불을 폈다. 언니가 죽은 뒤로 나는 거실에서 이모와 함께 잠을 잤다. 이모는 티브이에 관해서라면 모르는 것이 없었다. 몇 시에 어디에서 드라마가 시작하고, 드라마가 끝나면 8번에서, 다른 곳은 절대 안 되고 꼭 8번에서 뉴스를 봐야 한다, 는 나름의 루틴과 철칙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 날은 어쩐지 한참동안 채널을 넘기다가, 어느 케이블 채널에서 <인간극장>이 재방송하는 걸 보고서야 리모컨을 내려놓은 것이다. 국수집을 하는 노부부의 이야기였다. 장사가 잘 되지 않아 가게를 임대로 내놓는 장면이 방영되고 있었다.
<인간극장>엔 어떤 사람들이 나가는 거야?
그냥 평범한 사람들.
그럼 이모랑 나도 나갈 수 있어?
우린 너무 평범하잖아.
평범한 사람들이 나가는 거라며.
그 중에서도 희로애락이 있는 사람들.
우린 희로애락이 없어?
우린 너무 평범한 희로애락이지.
이모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으면서도 어쩐지 수긍이 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엔 잠든 이모 옆에 노트북을 펼쳐놓고 시나리오 파일을 열었다. 이모와 나눴던 대화를 옮겨 적어 보았다. 우린 너무 평범하잖아. 커서가 오래도록 깜빡였다. 며칠 전 동기가 독립 영화제에 낸 작품이 본심에 올랐다. 그런데 선뜻 축하의 말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 내 존재가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국수집 부부는 가게라도 내놓을 수 있었지만 나는 더 이상 팔 것도 없다. 언니가 살아있었더라면 이 말을 했을 텐데. 남들만큼 사는 것도 너무 어려운 일인 것 같다고.
나는 올해로 스물여덟이 되었다. 내후년이면 서른이 된다. 서른. 나는 이 문장을 자주 발음해보곤 했다. 내가 마흔이나 일흔이 되어도 새삼스럽지 않게 말이다. 가끔은 내가 늙어가는 어떤 여자의 몸에 갇힌 것만 같다는 생각을 한다. 내 모든 감각과 취향, 기억은 모두 열여덟 언저리에 머물러 있고.
언니가 좋아하던 아이돌 가수는 더 이상 잘나가지 않았다. 언니는 그걸 받아들이기 힘들어 했다. 요새 걔는 영 식었어, 골 빈 아줌마들만 좋아하잖아. 음악 프로그램 관계자가 지나가며 언니가 서 있는 방청객 줄을 가리켰다. 언니는 곧장 줄을 이탈해서는 들고 있던 응원봉으로 관계자의 머리를 내리쳤다. 그러나 언니와 함께 방청을 간 친구들 중 관계자의 모욕적인 말을 들었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방송국 블랙리스트에 오르면 더는 공개 방청에 참여할 수 없었으니까. 나는 언니가 법적 불이익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생각했다. 지금에야 변명해 보자면, 그렇게 말한 건 다 언니를 위해서였는데.
죄송합니다, 언니가 정신병원에 다녀요. 한 번만 봐주세요.
언니는 자신이 정신병자로 몰린 데 화가 난 건 아니라고 했다. 그럴 이유도 없고. 다만 그때 너무도 쉽게 머리를 조아리던 나의 태도가 자꾸 떠오르고, 그러면 참을 수 없이 괴로워진다고 했다. 너 때문에 나는 진짜로 골 빈 아줌마가 됐어. 언니는 울지도 않고 말했다. 그러나 이를 악물어서 그런지 턱이 덜덜 떨렸다. 나는 가끔 이모가 그토록 찾는 언니를 죽인 사람이 바로 내가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사람은 특정한 한 가지 이유로 죽지 않아요, 내 고해성사를 들은 상담의는 꽤나 단호하게 조언했다. 어쩌면 방청에 함께 갔던 친구들이나 이모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다면서.
병원에 다니는 걸 언젠가 이모에게 말해야 할 테지만 섣불리 먼저 이야기를 꺼낼 수가 없었다. 대학 동기들과의 술자리에서, 나 요즘 약 먹거든, 하고 가볍게 흘린 말이 그들에게 매번 화두가 된다는 걸 얼마 전에야 알았기 때문이다. 대개는 걱정하는 투로 시작하지. 나는 그것이 불쾌하고 또 견딜 수가 없어서 다시 병원을 찾는다. 나는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화나지도 우울하지도 자해하고 싶지도 누군가를 죽이고 싶지도 않고, 다만 그 모든 감정을 느끼는 것을 포기하고 싶다. 상담의는 통계학적으로 몇 퍼센트 이상의 사람들이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 알려주었고, 나는 내가 보편성에 기대어 속할 수 있는 어떤 집단이 있다는 것에 만족하여 또다시 무언가를 먹고 글을 쓰고 이모와 티브이를 보고…… 가끔은 엄마가 보고 싶어진다.
나에게는 이모와 언니가 있고, 우리는 우리를 가족이라고 부르지만, 어쩐지 나는 이모와 언니 사이에 내가 맞지 않는 모양으로 끼어있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초등학생이었던 언니와 나는 각각 12색 싸인펜 세트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언니의 싸인펜은 뚜껑이 없어 자주 말라 굳어버렸었지. 반면 나는 그런 것을 잃어버리는 아이가 아니었다. 이모는 언니가 선머슴 같다고 말하면서도 언제든 새 싸인펜을 사주었고. 나는 되도록이면 언니가 쓰던 것을 물려받았다. 물론 이모가 그런 것으로 나를 차별했다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어린 나를 만날 수 있다면 싸인펜을 막 쓰는 아이가 되라고 말하고 싶다. 누가 빌려간 싸인펜을 돌려받았을 때, 끝이 뭉툭해졌다며 밤새 시무룩해 하지 말고.
언니가 살아있을 때 우리의 유년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언니는 매번 뚜껑을 잃어버렸잖아. 그러나 언니는 그것에 관해서라면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다며 쓰게 웃었다. 일곱 번짼가 뚜껑을 잃어버렸을 때 처음으로 이모에게 종아리를 맞았다고. 너는 맞아본 적이 없지, 라면서.
얼마 전에 언니 앨범 팔았어. 밥을 먹다가 이모에게 이실직고 했다. 언젠가는 말해야 했다. ‘혜준’이 ‘해준’으로 쓰여 있어 불쾌했고,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이 언니의 물건 같지 않았다고. 나에게 상을 차려주고서 본인은 한창 출근 준비 중이던 이모가 갑자기 고개를 홱 돌렸다.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해. 언니가 그 싸인 받으려고 수십만 원을 썼어, 그런데 이름을 그따위로 써줬다니까? 이모가 양말을 신다 말고 내 쪽을 빤히 쳐다보았다. 어떤 감정을 참고 내리누르는 듯한 표정으로.
다시 받아와.
이미 팔았다니까.
혜준이 유품이야. 그걸 함부로 팔아?
이모도 차 팔았잖아. 언니가 큰 맘 먹고 산 거였어.
그게 그거랑 같니? 혜준이가 좋아하는 가수였잖아.
이모 진짜 웃긴다. 언니 살아있을 땐 한 번을 이해 못하더니, 죽으니까 다 이해가 되고 그래?
말이 헛나온 걸 알았지만 이제와 주워 담을 수 없었고, 그럴 생각도 없었다. 오히려 이렇게 소리를 지르니 마음이 편해진 것 같기도 했다. 이모가 건조대에서 마트 상호명이 박힌 앞치마를 네모반듯하게 개었다. 이모는 출근 직전에야 실핀이며 립스틱, 앞치마 같은 것을 아무렇게나 가방에 욱여넣는 사람인데. 나는 한참 동안 느적느적 밥알을 씹다가, 현관에서 신발을 신는 이모를 향해 넌지시 말을 건넸다. 잘 갔다와. 대답 대신 문이 쾅 닫혔다.
언니는 어렸을 적에 아이돌이 되고 싶어했고, 그 다음엔 스타일리스트가 되고 싶었고, 그마저도 되지 않자 연예 매니지먼트에 입사하려고 했지만 결국 어느 택배 회사의 경리가 되었다. 지금은 이렇지만 쉰이 넘으면 아이돌 숙소의 ‘청소 이모’가 되는 게 꿈이라는 얘길 진지하게 하기도 했다. 나는 그런 언니가 마냥 신기했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욕망할 수 있는 게 대단하기도 했고. 그래서 더 궁금했다. 언니는 스스로 목숨을 끊을 만한 사람이 아니다. 이 명제가 틀렸다면 나는 여태껏 언니를 모르고 살았다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를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나. 고민하다가도 이모와 내가 언니의 죽음에 대해 가지는 태도, 그 의연함이 너무나도 가족적이지. 가족같지. 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마는 것이다.
이십대 중반 쯤 언니는 식이장애 판단을 받았다. 적어도 십 년 이상은 지속된 것 같은데 왜 이제야 병원을 찾았냐며 의사에게 혼이 났다고 했다. 언니는 잘 먹지 않았다. 그냥, 먹는 행위 자체가 귀찮은 사람처럼 보였다. 특히 가족 셋이서 하는 식사를 가장 힘들어 했고, 종종 토기가 치민다고도 했다. 나는 그것이 이모의 탓이라고 생각했으며…… 아니다. 그만 두자.
인정한다. 이모와 나는 언니가 특히 힘들어 했던 것, 죽음에까지 결부될 수 있을 만한 기억을 취사선택하고 있었다. 언니는 식이장애를 달고서도 잘만 살았다. 새벽에 방에서 혼자 끓여먹는 라면을 좋아했고. 나는 설거지를 하다 말고 해준에게 쪽지를 보냈다. 싱크대에 걸쳐 놓은 고무장갑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 물건은 사실 언니의 유품이고, 다시 돌려주었으면 한다는 내용의 짤막한 글을 적어내리고 보니 나 자신이 너무나도 한심하게 느껴졌다. 남은 그릇을 마저 닦다가 고무장갑을 아무렇게나 벗어던지고 싱크대 앞에 쪼그려 앉아 울었다. 누가 이모와 화해하는 방법을 알려주었으면 좋겠다. 언니가 죽은 뒤 이모와 나는 서로에게 죄책감을 떠넘기지 못해 안달난 사람처럼 굴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언니를 잘 알지 못했으니까.
해준은 교복 위에 품이 넓은 후드 집업을 걸치고 있다가, 나를 발견하고서는 그 안에서 싸인 앨범을 꺼내었다. 어제 주고받은 텍스트 상으로는 꽤나 화난 듯해 보였는데 실제로 마주하니 꼭 그런 것 같지만도 않아 보여 다행이었다. 물론 굉장히 뾰루퉁한 얼굴이긴 했지만. 나는 햄버거 세트가 포장된 종이 가방을 건네었다. 해준이 안을 들여다보고서는, 학원가야 돼요, 하고 그것을 다시 나에게 내밀었다.
들고 가서 나중에 먹어요.
그런 거 두면 냄새 난다고 애들이 지랄해요.
나는 의기소침해져 해준이 건넨 것을 백팩에 욱여넣었다. 어른답게 행동하지 못해서인지 되려 해준이 내 눈치를 보는 게 느껴졌다. 해준과 나는 서로를 의식하며 어물쩍 서 있다가, 굳이 우리 사이로 지나가는 남자를 피해 한 발자국씩 멀어졌다. 미안해요. 사과를 건네자 나를 말끄러미 쳐다보고 있던 해준이 이내 시선을 떨구고서 우물우물 대답했다. 어차피 엄마한테 걸리면 더 혼났을 거라고. 부모님이 연예인 좋아하는 걸 싫어하시나봐요. 덕질 하느라 공부 안 하는 줄 알아요, 저번에 딱 한 번 학원 째고 공방 갔다 온 적 있거든요. 전철이 막 도착했는지 사람들이 우리를 지나쳐 에스컬레이터를 성큼성큼 뛰어 내려갔다. 그러다 누군가 내 백팩을 툭 쳤는데, 그 바람에 안에 든 콜라가 쏟기는 느낌이 들었다.
뭐라도 좋아해야 살지.
내가 목포에서 언니를 찾았을 때, 언니는 다른 할 말이 없다는 듯 덤덤하게 그런 말만을 반복했다. 때린 사람들을 고소하자는 말에도 그저 핸들을 꾹 쥐고서 아무것도 없는 도로를 내다볼 뿐이었지. 내가 콜라 범벅이 된 백팩을 정리하고 있자, 가만가만 지켜보던 해준이 얼른 언니의 앨범을 가져가 자신의 소매로 그것을 닦았다. 나는 아홉 살이나 어린 고등학생 앞에서 덤벙대고 있는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저 학원 늦었어요. 해준이 들고 있던 앨범을 내 손에 쥐어주고선 꾸벅 인사를 했다. 나는 에스컬레이터를 향해 뛰어가는 해준의 뒷모습을 보다가 문득 언니의 앨범 사이에 쪽지 같은 것이 끼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한 쪽 귀퉁이가 콜라에 젖은 쪽지.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한 글자도 허투루 쓰지 않은 해준의 동글동글한 글씨체를 꼼꼼히 들여다보았다. 노래 가사 같은 것과 함께 적힌 말이었다. 목포에서 서울까지 돌아오던 길에도 차 안에서 노래를 들었다. 차창을 반쯤 열어둔 탓에 바람이 머리칼을 사방으로 나부끼게 했고, 나는 그것이 영 성가셔 인상만 팍 구기고 있었다. 노래가 반복 재생될 무렵 언니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언니가 중학생일 적에는 밥 먹고 옷 사 입을 돈 아껴 좋아하는 가수의 앨범을 사고 콘서트에 가는 것이 꽤나 대단한 일이었다. 그런데 한두 살 나이를 먹을수록 그런 것은 오히려 부끄러운 일이 되더라고. 걔 스타킹 봤어? 완전 너덜너덜하더라니까, 같은 팬인 게 쪽팔린다. 고삼 때였던가. 같은 반 친구가 뒤에서 핀잔어린 말을 늘어놓던 것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이젠 그 친구의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질 않는데, 다만 자신의 다리를 말끄러미, 조금의 숨김도 주저함도 없이 그저 말끄러미 쳐다보던 열 몇 개의 눈동자들만 떠오른다고. 그래서 쓸모도 없는 아이돌 앨범이며 굿즈를 자꾸만 사들이게 된다고. 어쩔 수가 없다고. 나는 괜히 머리칼을 귀 뒤로 빗어 넘기며 딴청을 부렸다. 언니가 그런 것들을 ‘쓸모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던가. 해준의 쪽지를 입안으로 웅얼거려본다. 그런다고 그때 언니와 들었던 멜로디나 가삿말이 떠오르는 것은 아니었는데도. 그때 들었던 노래의 가사가 맞는 것 같다, 혼자 고개를 끄덕이면서.
마트 앞 아파트 단지에서 이모를 기다리며 찌그러진 햄버거를 먹었다. 포장지에 소스와 기름이 눅눅하게 배여 식은 채였지만 맛은 좋았다. 나는 이곳 벤치에 앉아 분리수거장 보는 걸 좋아한다. 아무리 봐도 아직 쓸 만한 걸 내다 버리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는 어떤 여자가 15권짜리 완결 만화책을 버리는 것을 보았다. 흥미가 생겨 분리수거장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와중 경비가 대뜸 말을 붙이기에 재빨리 자리를 피했지. 일전에 말했던 노인들의 싸움도 이곳에서 보았다.
내가 아주 가끔 엄마를 보고 싶어 하는 것처럼 언니도 아버지를 보고 싶어 했는데, 그건 그 사람이 너무나도 싫기 때문이라고 했다. 몇 년 전 우리는 이모 몰래 그 사람을 만나러 간 적이 있다. 이모와 언니의 아버지는 언니가 돌도 지나지 않았을 때 헤어졌다. 그 후 언니가 직장인이 되도록 연락 한 번 않다가 어느 날 갑자기 안양의 술집에서부터 전화가 온 것이었다. 제발 느이 아버지 좀 데려가라고. 언니는 자는 나를 깨워 택시에 태우곤 아무 말이 없었다. 그 사람의 번호는 맞지만 그 사람에게서 연락이 온 것은 아니었으니까.
언니의 아버지는 방 안에 들어온 언니를 보고선 대뜸 노래를 불러보라고 했다. 그것이 몇 십 년만의 조우였다. 나는 그의 깽값이며 외상값까지 계산하는 언니가 참 답답하지만서도 무어라 말을 얹지는 못했다. 언니와 언니의 아버지와 나는 한참 동안 거리를 배회하다가 어느 국밥집에 들어갔다. 그는 술버릇이라 하기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욕설을 지껄였다. 씨발것의 술집년들이 나를 무시했다, 는 부분에서 나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조용히 좀 하세요, 다른 손님들도 있잖아요. 말을 내뱉고선 바로 후회했다. 곧장 맞을까봐 손이 벌벌 떨렸는데, 그는 그저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다가 다시 국밥에 고개를 처박았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초라한 노인의 얼굴을 하고.
언니는 이후로 몇 번인가 더 그를 만났다. 내가 말려도 속수무책이었다. 나는 이모가 양육비를 언급하기만 하면 연락두절이 되었던 그가 언니의 휴대폰 번호를 가지고 있는 것이 꺼림칙하게 느껴졌는데, 언니는 그가 자신을 잊지 않았다는 데 적잖이 충격을 받은 듯했다. 언니는 내가 이모에게 모든 것을 말하기 직전에야 그와 연을 끊었다.
얼마 전에 태어난 딸이 있대. 그러면서 나한테 같이 동사무소에 가자는 거야. 출생신고를 해야 한다고. 그래서 그 사람이 나한테 같이 술을 마시자고 한 건가 싶었어. 맨정신에는 절대 말 못할 사람이니까. 그래서 그냥 동사무소에 따라갔는데…… 애 이름을 박힌년으로 짓겠다는 거야. 동사무소 직원이 몇 번이나 다시 확인해 달라더라. 정말로 이렇게 해드리냐면서. 근데 난 그러는 거 보고도 뒤에서 가만히 있었어. 괘씸하기도 했고, 굳이 내가 참견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자꾸 후회가 되더라. 아무리 그래도 애한테 그런 짓을 하면 안 되는 거잖아.
나는 언젠가 상담의에게 자주 꾸는 꿈에 대해 말했다. 언니의 이름이 박혜준이 아니라 박힌년이 되는 꿈인데, 나만은 언니를 ‘언니’로 부를 수 있어 꿈속에서도 다행이라 여겼다고. 실제로 그런 이름의 아이가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려도, 내 언니가 아니라 다행이라는 생각만 한다고. 이런 내가 너무 이기적인 거냐고. 나의 말에 상담의가 무어라 대답했지만, 솔직히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냥 내가 이러이러한 생각들을 남에게 털어놓았다는 사실만이 나를 수치스럽게 했다.
이모는 내가 애써 되가져온 언니의 앨범을 보고도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가는 길에 빵집 들렸다 가자, 세일한대. 엉뚱한 말만 늘어놓았다. 나는 그게 이모만의 화법이라는 걸 알았다. 이모는 껄끄럽고 불편하지만 해야만 하는 말을 할 때 늘상 티브이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운을 뗐다. 내가 문방구에서 립스틱 모양 사탕을 훔쳤을 때, 학교에서 매일 검사하는 일기장에 엄마의 진실을 써놓았을 때, 언니의 교복 치마에서 담배가 나왔을 때, 어디론가 전화를 걸어 양육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때. 이모는 무어라 혼을 내는 건지, 무슨 요구를 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궁시렁대는 건지 모를 투로 그저 상대에게 할 말을 흘리다가 어느 순간 입을 꾹 닫았다. 말을 하면 할수록 초라해지는 것 같다, 고 이모는 말했다.
이모는 언니와 나에게 아주 어렸을 적의 기억, 그러니까 시골에 살면서 몰래 아기 고라니를 키운 일이나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죽을 뻔한 일 따위를 추억에 젖은 얼굴로 말하다가도, 상경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언니가 목포에서의 사건을 없었던 일과 같이 여기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나는 엄마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런 얘기를 하면 할수록 내 곁에 엄마가 없다는 것이 더 구체적인 사실로 와닿기도 했거니와, 이모의 눈치가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이모가 눈치를 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렇지만, 어떤 예감이, 그러니까 내가 엄마 얘기를 꺼내면 이모는 “네 엄마한테 가”라고 미련 없이 말할 것만 같은 그런 예감이 들었다. 이것이 바로 언니가 싫어했던 내 졸업 영화의 내용이다. 상영회에서 돌아오던 길, 언니는 핸들을 쥔 채 말이 없었고 이모는 반으로 접힌 영화 포스터를 손에 꼭 쥐고 차창 밖을 응시했다. 뒷자리에 앉은 나는 수많은 꽃다발과 선물에 적힌 카드를 읽어보고 있었지. 선배님, 졸업 축하해요. 영화 진짜 감동적이었어요.
쟤, 걔네. 혜준이가 좋아하던 애.
반값 세일 커스터드 빵을 조금씩 떼어 먹던 와중 이모가 턱짓으로 티브이를 가리켰다. 익숙한 얼굴이 번쩍번쩍한 조명을 잘도 받아내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카메라는 틈틈이 무대 아래에서 응원봉을 흔들고 있는 팬들에게로 앵글을 돌리기도 했다. 그렇게 티브이로 송출되는 팬들은 대부분이 백인이었고, 나는 언니가 저런 곳에서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너무나도 기만적이라고 생각했다. 이모는 젊고 아름다운 아이돌 가수의 얼굴이며 몸짓 같은 것을 하나하나 뜯어보다가, 불현듯 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혜준이가 어렸을 때 꿈이 가수였는데.
이모, 정확히는 아이돌이었어. 말을 얹으려다 말고, 한참 동안 빵을 입안에 가득 넣고 우물거리다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모. 응? 이모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나는 어쩐지 이모의 정면을 보는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고 느꼈다. 그러니까, 나의 정면과 이모의 정면이 정면으로 부딪히는 일이. 그 사람이랑은 어쩌다가 만났어? 그 바람에 진짜 묻고 싶은 말을 하지 못했다. 대신
나는?
하고 멍청하게 질문을 내던졌는데, 그와 거의 동시에 이모의 시선이 다시 티브이로 향했다. 너는 영화 만들 거잖아. 그거 말고, 나 어렸을 때 꿈 말이야. 이모는 당황하지도 않고 내 앞에 있는 커스터드 빵을 가져다 손톱만큼을 떼어내면서 말했다. 넌 어렸을 때 얌전했지, 난 네 언니가 사고 칠 때마다 가슴이 철렁했다. 이모가 웃기에 나도 따라 웃었다.
내 꿈은 엄마를 다시 찾아가는 것이다.
이따금씩 목포에서 돌아온 언니와 보냈던 저녁을 떠올린다. 백화점 식당가를 몇 번이나 빙빙 돌면서도 먹고 싶은 것이 없다기에 억지로 아무 곳에나 데려가려던 찰나였지. 교보문고의 음반 코너 앞에 멈춰선 언니가 아차 싶은 표정으로 내 소매를 끌어당겼다. 나 여기 가야 돼. 언니가 가리킨 곳에는 앨범을 사면 싸인회 응모권을 준다는 공지가 적혀 있었다. 언니는 그 자리에서 수십만 원 어치의 앨범을 샀다. 당장 죽으려던 사람이. 나는 그때 언니를 이해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냥…… 언니는 그런 사람이다. 언니의 그런 삶을 나는 그저 인정해야만 하고. 우리는 결국 저녁을 먹지 못한 채 백화점을 빠져나왔다. 언니가 죽고 나는 그것 딱 하나만을 후회했다. 그래도 함께 밥을 먹었어야 했다고.
3·15청년문학상 단편소설 심사평
본심에 오른 작품은 「재생」, 「그럼에도 아침」, 「다다를 수 없는 마음」 세 편이었다. 먼저 「재생」은 새로운 호스피스케어를 가상현실로 이야기한다. 부모의 대학시절이 현재시간에 소설적 활기로 작동하지 못할 뿐더러 가상현실 속을 해매는 죽음을 앞둔 인물의 이야기가 그렇게 설득력 있게 그려지지 못했다, 서사방법은 소재를 해석하고 전달하는 통로이기에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 현실은 치열한데 젊은이들이 그걸 피할 이유가 있겠는가.
「그럼에도 아침」은 보습학원에서 국어과목 조교로 일하는 작가지망생 주인공의 이야기로 다소 평범하다. 스토리가 확장되지 않고 주인공의 일상과 자의식에 갇혀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는데 그 자의식조차 그렇게 개성적이지 않다. 투고자는 소설이 왜 허구와 과장을 허용하는지를 숙고해 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다다를 수 없는 마음」은 사촌언니의 자살과정을 살피는 일인칭 소설로 안정된 문장력과 짜임새 있는 구성을 통해 오늘날 젊은 세대의 모습을 설득력 있게 그렸다. 소외와 대리만족, 타인에 대한 이해, 가족관계 등의 다층적 문제의식을 스토리 속에 잘 녹이면서 인물들을 생동감 있게 창조했다. 소재를 풀어 문제의식을 드러내는 넘치지 않으면서 자유로운 작가의 솜씨가 돋보인다. 당선작은 신인의 탄생을 축하한다는 찬사를 받을만한 작품이다.
당선자와 예심통과자는 물론 모든 투고자의 정진을 바란다.
심사 위원: 이정임(소설가)·조갑상(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