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4학년이다. 졸업이 다가오니 지금까지 대학 생활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생각해보면 내 대학 생활의 8할은 학보사 활동이 채운다. 학생기자로 남들은 경험하지 못한 특별한 활동을 해왔다. 그러나 대학생이 아닌 직장인의 삶을 살아낸 기분이다. 직장인의 뒷주머니에 상시 준비된 사직서처럼 내 마지막 월영지도 노트북 배경화면에 저장되어 있었다. 힘들 때마다 끄적인 말과 뿌듯한 순간이 기록됐다. 시간이 흘러 1년이 지났고 어느덧 마지막 월영지를 채울 때가 왔다.
학생기자로 시작은 거창하지 않았다. 2018년 내가 가는 곳마다 ‘경남대학보사 61기 수습기자 모집’이 적힌 대자보가 붙어 있었다. 이제 막 20살이 된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전화를 걸었고 61기 수습기자가 되었다. 수습기자는 학보 만드는 일에 바로 참여하지 못하고 정식 기자가 되기 위한 과제를 해야 했다. 많은 수습 과제를 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수습신문이다. 수습신문을 위해 아이디어를 내고 조사한 내용을 토대로 기사를 썼다. 밤을 새우면서 동기들과 함께 수습신문을 완성했다. 당시엔 힘들었지만, 지금은 힘들 때마다 생각나는 추억이 됐다.
수습기자를 지나 정기자가 되었을 때 느낀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학보사 일정을 소화해야 했기 때문이다. 빡빡한 편집 일정과 아이디어 고갈도 문제였지만, 가장 큰 고민은 글쓰기였다. 글은 쓸수록 주제에서 벗어났고 항상 맞춰지지 않는 매수 때문에 스트레스받는 날이 이어졌다. 힘들게 완성한 글을 믿지 못해 보고 또 보며 의심만 키웠다. 마감일 끝에 선배에게 전송한 글은 매번 다른 글이 되어 돌아왔다. 고쳐진 글을 보면 속상한 감정이 들면서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정기자 시절, 완벽한 내 글 하나 완성하는 게 어려웠다. 그래도 그때 선배들의 조언과 교정 덕분에 글이 많이 늘었다.
2020년, 나는 편집국장이 되었다. 새로운 시작으로 들떴지만, 코로나19 때문에 모든 일정에 차질이 생겼다. 편집국장은 모든 기사를 읽고 고치며 학보 전반적인 구성을 하고 학보사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책임져야 했다. 부담이 컸지만, 이 직책 덕분에 책임감이 생겼고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게 됐다. 일 년 동안 많은 사람과 만나며 감정을 나누고 풀리지 않던 문제와 관계 때문에 힘들면서 배운 점도 많았다. 편집국장이 아니었다면 직접적으로 느끼지 못했을 일들이다.
수습기자, 사회부 기자, 편집부국장을 거쳐 편집국장까지 경험해 보고나니 학보 하나 하나의 가치를 감히 매길 수 없다. 그러나 많은 학우가 묻는다. “학보를 보는 사람이 있나요?” 아무도 보지 않을 것 같은 결과물을 끝없이 만들다 보면 회의감이 찾아온다. 그럴 때마다 드는 좌절감을 오래 붙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학보사를 애정으로 시작해 지금은 애증이라고 정의한다. 밉지만 없으면 허전한 친구 같다. 친구를 추억으로 하고 새로움을 찾아 흘러가려 한다. 공허함에 다시 친구를 붙들고 싶은 마음이 들지만, 어쩔 수 없다. 고여 있으면 발전이 없고 썩기 마련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