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다섯에 늦깎이 대학 생활을 시작했다. 친구들은 졸업을 준비할 나이였으니 낙오병이라는 자괴감이 없지 않았다. ‘그래도 늦은 건 없어. 낙오한 자만이 볼 수 있는 풍경도 있겠지.’
지금도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나의 낙천주의는 신입생 시절의 캠퍼스로부터 온다. 무엇보다 나는 만으로 둘러싸인 바다를 교정으로 거느린 캠퍼스가 좋았다. 저 바다가 바로 임화의 시 「현해탄」의 바다로구나! 바다가 캠퍼스니 바닷가의 소라와 게들, 말미잘과 교우 관계를 맺으며 시를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치자향이 좋던 가포와 장지연 열사의 유택이 있던 현동과 덕동 바닷가를 떠돌며 자취생 생활을 하였다. 버스를 타고 통학을 하는 불편이 있었으나 모름지기 은자란 그런 불편을 복으로 삼을 줄도 아는 것!
강의를 마치면 학교에서 야간 수위 아르바이트를 했다. 대학원이 있던 건물이 나의 첫 임지였다. 정문 수위 아저씨들이 나의 수더분한 선임들이었는데 야경주독하는 모습을 대견스럽게 여기셨던지 많은 편의를 봐주었다. 가령, 순찰 임무는 등한시하고 거의 출근과 동시에 수위실에 틀어박혀 꼼짝 않고 소설책이나 파고 있는 나의 해태(懈怠)를 매번 눈감아 주었다.
내가 근무를 제대로 서나 안서나 꼬장꼬장한 잣대를 들고 삼엄하게 감시를 한 시어머니는 따로 있었다. 학교 연못에 터를 잡은 그는 성실이 극에 달해서 쉴 틈 없이 순찰을 돌았다. ‘아이구나 내가 저 등살에 못살지.’ 마치 녹슨 철문을 열었다 닫을 때 나는 소리처럼 쇳소리가 나는 그의 허스키 보이스는 쩌렁쩌렁 언덕 넘어 예술관까지 들릴 만큼 진폭이 커서 그가 바로 이 대학의 터줏대감임을 능히 알게 하였다. 하긴, 한밤에 조금이라도 수상한 소리가 나면 그 요란한 호각을 불며 출동을 하였으니 내 수위 업무의 태반은 그가 본 것이나 다름없다.
그 무서운 수위 선임은 거위였다. 노을이 지면 나는 거위와 함께 저물어 가는 교정에 가로등을 켰다. 멀리 돝섬에도 접선 신호처럼 불이 들어오고 하늘에도 개밥바라기별이 켜지면 나의 대학도 어느새 점등인의 별이 되었다. 새벽이면 서리에 으슬으슬 입술을 깨물고 떨고 있는 별들에게 이제 질 때가 되었다는 신호로 스위치를 내리기 위해 눈을 부비며 일어났다. 그때도 거위는 나와 함께였다. 가로등 스위치 오르내리는 소리를 따라 천체가 회전을 하는 것 같았을 때, 늦깎이 대학 시절의 열패도 실패로 얼룩진 습작기의 낭패와 가난도 조금은 견딜 만한 것으로 바뀌어 갔으리라.
대학원 수위실에서 나는 짬이 날 때면 대학원생 선배들의 구두를 닦았다. 가을인가 겨울인가 기억에는 없지만 어느 명절 앞날이었으리라. 고향 내려갈 준비로 다들 어수선할 때, 식사를 마치고 수위실에 들른 같은 과 조교 선배의 깨어진 구두코가 보기 참 딱했다. 상처에 연고라도 바르듯이 코에 까무스름 구두약을 바르기 시작한 것이 마칠 때쯤 해서는 구두 전체가 유리처럼 반짝거렸다. 내게 세탁 기술이 있었다면 아마 구겨진 옷 주름을 수평선처럼 좍 펴 주고 싶었으리라. 내가 시에서 배운 것은 무슨 일을 하든 마음을 다하면 솜씨가 따라온다는 것이었다.
그 이후부터 대학원생들의 구두가 수위실을 구두 병원으로 만들었다. 심지어 행정실 직원들의 구두까지 순번을 기다리는 일이 일어났다. 생수병을 오려 만든 내 저금통엔 슬며시 놓고 간 지폐들이 모여 한 학기 장학금이 되었다. 나중에 계산을 하다 보면 만 원짜리 지폐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그들도 어려울 텐데 구두 값 핑계로 나를 도와주고 있는 것이었다.
어느 날 수위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오가는 길에 가끔씩 부딪치던 행정실 직원이었다. 그는 대뜸 점심을 같이 하자고 했다. 영문을 몰라 하는 내게 그는 몇 년간 지켜보았는데 일하면서 공부하느라 고생이 많다고, 동생 같아서 밥을 한 끼 사 주고 싶었노라고 했다.
그날 나는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밥을 대접받았다. 그 ‘밥심’으로 시를 쓰고 책을 만들며 여기까지 온 것 같다. 물론, 밤새 습작을 하던 나 대신 순찰을 돌던 그 극성스럽던 거위의 고마움도 잊을 수 없다.
손택수(동문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