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학기를 마무리하는, 제 강의 ‘시문학창작’의 종강과 기말고사에 대면 강의를 신청해 놓고 안타깝게도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대학 측의 비대면 요청에 의해서입니다. 저는 11월에 코로나19 확진자와 접촉한 지인과 같이 식사를 했습니다. 지인은 저와 식사를 한 후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날 대학에 즉시 사태 보고를 하고 집에서 개인적인 ‘자가 격리’에 들어갔습니다. 지인은 즉시 확진 검사를 받았습니다.
지인의 양성/음성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저는 지인과 식사를 한 ‘죄’로 집에서 발이 묶였습니다. 과장하자면 일종의 코로나19판 ‘유배’였습니다. 코로나 검사에 대한 결과는 즉시 나오지 않았습니다. 검사는 평균 24시간 후 결과가 통보된다고 들었습니다. 그 결과를 기다리는 시간이 이리저리 얽힌 일들로 ‘일각이 여삼추’였습니다. 발 없는 소문은 천 리를 달려 나갔고, 저를 찾는 휴대폰은 쉬지 않고 울렸습니다.
저는 하루 남짓 현대판 ‘유배’ 시간을 보내며 조선 후기의 실학자로 강진으로 유배 간 다산 정약용(1762-1836) 선생을 떠올렸습니다. 선생은 1801년 이른바 ‘신유사옥’으로 18년(1801-1818) 동안 유배 생활을 했습니다. 말이 18년이지 지금과 다른 환경에서 그건 ‘생지옥’과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강진에 있는 다산 유배지를 즐겨 찾습니다만, 다산의 생애를 헤아려보면 늘 명치끝이 저려왔습니다.
인근 김해에는 다산보다 더 오랜 유배로 아예 조정에서 잊혀버린 학자가 있습니다. 낙하생(落下生) 이학규(李學逵, 1770-1835) 선생은 김해에서 24년의 유배 생활을 했습니다. 그 역시 다산과 마찬가지로 ‘신유사옥’으로 1801년 김해로 유배돼 1824년 해배되었습니다. 다산의 먼 인척으로 김해로 유배와 사실상 조정에서 잊힌 분입니다. 다산보다 무려 6년이나 더 유배 생활을 한 셈이지만.
오랜 유배로 아들이 임금에게 호소해 해배되었습니다. 그는 유배 기간 어머니를 잃고 아내를 잃었지만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다산이나 낙하생, 두 분 다 독한 유배를 글쓰기로 이겨나갔습니다. 잊히고 갇힌 자의 고통은 다른 일에 몰두하면서 그 시간을 이겼습니다. 저는 혹 확진 판정을 받게 되면 어찌 되나 하는 걱정으로 좌불안석이었습니다. 명색이 시인인데 시 한 편 써보기에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습니다.
결과는 지인이 음성이 나와 환호성을 부르고 대학에 연락을 했습니다. 대학 측은 기말고사에도 강의실에 나오지 말 것을 부탁해, 한 학기 동안 정이든 학생들과 작별의 시간을 같이 나누지 못해 안타까웠습니다. 24시간의 ‘유배’는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사람이 살아가면서 마주치는 사람이 굉장히 많다는 사실과 그래서 코로나19의 전염성에 새삼 놀랐습니다.
불가에서 말하는 ‘인다라망’처럼 수많은 인연에 피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 하루 400~500명의 확진자가 쏟아지는 현실에서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석좌교수·청년작가아카데미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