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구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 언론출판원
  • 승인 2020.12.02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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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라우마는 우리의 삶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부정적인 경험으로 인해서 생겨난 트라우마는 기억상실증과 같은 질환에 걸려 사건 당시의 상황을 아예 기억하지 못하는 일도 생긴다. 때로는 충격을 받았던 일을 잊지 못해 평생 기억 한구석에 남아있는 경우도 있다. 나는 후자이다. 그 당시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 내 유년 시절은 온통 암흑천지였고, 잊혀지지 않는 장면들이 꿈속으로 나타나 몇 번이나 가위에 눌리기도 했다. 어쩜, 나는 나로 인해 교통사고를 당해 세상을 일찍 떠난 내 동생을 구하지 못했던 못난 형의 자책일 수도 있다. 따라서 내가 가장 슬픔은 동생을 지키지 못한 일이다.

  내가 초등학생이 되기도 전의 일이었다. 우리 집은 항상 분위기가 밝았다. 우리 가족은 어느 가정 못지않게 평범했지만 행복했다. 가족들은 늘 밝은 얼굴로 대화도 잘했으며 미소가 끊이지 않는 집이었다. 특히, 어머니는 밝고 활발하신 분이셔서 나에게 운동도 가르쳐주시고 책도 재미있게 읽어주셨다. 어머니의 다정한 말소리를 들으면 우리 형제는 항상 마음이 따듯해졌고 행복한 마음이 들었다. 다정다감한 어머니는 남자아이들인 우리와 함께 같이 뛰면서 놀아주기도 하셨다. 그 사고가 일어난 날도 어머니와 우리 형제는 집 앞에 있는 초등학교에 가고 있었다. 나와 동생은 학교 운동장에서 뛰어놀 생각에 들떠 있었다. 누군가 그때 우리의 모습을 보았다면 흠뻑 미소를 지어 보여도 좋았을 만큼 평화롭고 화목한 한 가정의 모습이었다. 정말 모든 것이 좋았었다.

  나와 동생은 운동장에서 즐겁게 술래잡기를 하며 뛰어놀았다. 그 곁에서 어머니께선 흐뭇하게 웃으시면서 우리가 노는 모습을 바라보고 계셨다. 한참을 놀다 보니 온몸에 땀이 흥건해지고 갈증이 나기 시작했다. 우리는 다 같이 음료수를 사러 학교 뒤쪽 문방구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런데 가던 도중에 어머니께서 잠시 어디에 갔다 오신다고 하시며 학교 후문에 가만히 기다리라고 하셨다. 나는 내 동생과 함께 서서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들은 가만히 서 있는 것이 지루했던 나머지, 나는 내 동생의 손을 놓고 날아다니는 나비를 보게 되었다. 나비의 노란 날갯짓에 어린 나는 시선을 빼앗겨 버리고 말았다. 눈이 부신 햇빛 속에 날아가는 나비를 보던 도중, 그제야 나는 동생이 없어진 것을 깨닫고 주위를 돌아보았다. 동생은 종종걸음으로 문방구를 향해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었다. 나는 동생의 이름을 부르며 동생 쪽으로 가려고 발을 내디뎠다. 그 순간, 갑자기 옆에서 달려온 승용차가 내 동생이랑 부딪혔다.

  겨우 6살 남짓 된 아이였던 나의 뇌로는 그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그 광경을 본 나는 눈앞이 캄캄해졌고 귀는 먹먹해져서 주위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모든 세상이 일시에 멈춰졌고 나는 시간에 갇혀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처럼 그 자리에 굳어져 있었다. 다시 내 몸의 시각과 청각이 돌아왔을 땐, 내 눈앞엔 동생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고 내 뒤에선 어머니의 절규에 가까운 비명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 이후의 기억들은 대부분 단편적이다. 내가 너무 어려서일 수도 있지만 참혹했던 그 순간을 담지 않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다.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것은 마치 영화의 장면처럼 한 컷, 한 컷씩뿐이다. 앰뷸런스 소리와 함께 나타나는 구급대원들, 내 동생이 들어가고 굳게 닫히던 응급실 문, 의사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주저앉아 울고 계시던 어머니와 조용히 눈물만 흘리시던 아버지. 그리고 이 부분적인 기억들이 내 뇌리에 박혀 6살 때의 나를 평생 원망하게 되었다. 나의 부주의한 행동으로 인해 내 소중한 동생이 일찍 세상을 떠났다. 나는 못난 형이었다.

  내 동생이 죽었을 때, 나는 너무 어린 탓에 ‘죽음’이라는 개념을 잘 알지 못했다. 내가 나이를 먹으면서 비로소 죽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되어서야 뒤늦게 동생의 죽음을 슬퍼하고, 후회하고, 자책하게 되었다. 이럴 때마다 어머니는 나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씀해 주셨다. 나는 가족의 따듯한 보살핌과 사랑 안에서 동생을 잃은 슬픔을 다스리게 되었다. 이렇게 나 자신을 자책하고 원망해봐야 죽은 동생은 결국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누군가가 말했다.“슬픔은 과정이지, 상태가 아니다.”라고 말이다. 이 슬픔이 나를 오랫동안 억누른 것은 사실이지만 나는 슬픔 속에서 나를 지키며 성장해왔고, 그 덕분에 나의 가족을 더욱 사랑할 수 있었다. 우리 곁을 떠난 동생도 이 슬픔의 감옥에서 우리 가족이 허우적거리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동생에게 이 말 한마디는 꼭 해주고 싶다. “형이 구해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

이현동(스포츠과학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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