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 아고라] 작은 독서 모임 이야기
[한마 아고라] 작은 독서 모임 이야기
  • 언론출판원
  • 승인 2020.11.04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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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합포만에 쏟아지는 햇살이 눈부십니다. 그 빛은 숲에서 더욱 선연하게 드러납니다. 신갈나무 황금색 잎은 바람에 날려 우수수 떨어지고, 밤나무, 오리나무, 사시나무들이 자기 나름의 빛깔로 숲을 빛나게 합니다. 산길에는 보랏빛 쑥부쟁이와 진홍의 여뀌, 노랑 산국이 가을을 더 풍성하게 합니다. 나무와 풀, 햇살과 바람이 어울려야 가을 풍경이 완성되듯 우리네 사는 모습도 혼자가 아니라 함께할 때 신바람이 납니다. 이렇게 더불어 책 읽기의 즐거움을 나누는 작은 독서 모임을 소개합니다.

  마산합포구 완월동의 낡은 상가에 작은 북카페가 생겼습니다. 반가워 차를 마시러 가니, 낡은 레코드에서 비틀즈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젊은 주인은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손님 없는 이곳이 반갑고 아까웠습니다. 혼자 책을 읽을 것이 아니라 함께 읽고 싶었습니다.

  ‘시 낭송 및 고전 낭송 모임 안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① 대상: 시와 책을 좋아하는 사람 누구나 (나이 제한 없음), ② 장소: 카페 북커비 단, 커피값 본인 지참(단체 할인 적용) ③ 도서: 고전소설 변강쇠전, 풀꽃의 시인 나태주, ④ 모임 준비하는 사람: 이 동네 사람, 이선애, ※ 기타 사항은 카페 북커비 사장님께 문의.

  쪽지 한 장을 카페 문 앞에 붙였습니다. 가까운 곳에 사는 벗 한 명이 동참해 주기로 하여 사람이 없으면 둘이서 책 읽고 이야기하다 오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세상은 언제나 놀라움의 연속입니다. 작은 쪽지에 화답하듯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책이 좋아 찾아왔던 다섯 벗과 지금도 매달 한 번씩 모여 책을 낭독하고 이따금 맥주를 마십니다. 그렇게 5년의 세월이 흘렀고 우리는 수많은 책을 읽었습니다.

  봄날에는 판소리 『춘향전』을 낭송하며 조선 젊은이들의 눈부신 사랑을 느꼈으며, 사랑 앞에 당당한 춘향이 오히려 현대적 의미의 여성임을 성토하였습니다.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은 가정 폭력과 장애인과 노인 문제, 가족의 의미 등으로 변주되면서 밤이 늦도록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흰 눈이 내릴 즈음엔 백석의 시를 읽었고, 화제가 된 책들도 꾸준히 선택되었습니다.

  지금도 떠오릅니다. 문에 달린 종이 울리고 “오늘 여기서 독서 모임 하는 것 맞나요?” 물었던, 낯설지만 가까운 곳에 사는 벗들과 만나던 가슴 벅찬 순간. 그 카페는 이 년을 채우지 못하고 젊은 주인은 직장으로 돌아갔지만, 책 읽는 소리가 그리울 때면 찾아옵니다.

  우리나라에는 문화와 예술을 일반 대중이 함께할 수 있는 다양한 제도가 있습니다. 이것과 함께 자발적으로 문화를 만들고 함께 누리는 동네 단위의 생활밀착형 모임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책을 이야기하고 시를 낭송하고 음악회를 함께 찾아가는 작은 모임을 통해 우리는 하는 일과 사는 모습은 다르지만, 서로의 마음에 접속하였습니다. 동네 아이들에게 관심을 가지기도 하였고, 연말이면 정성껏 그림을 그린 에코백, 장미꽃, 엽서 등을 선물하였습니다. 무료 국악 공연을 보며 가을밤을 즐겼고, 문학 강연은 앞자리에 앉아 들었으며, 슬픈 일에는 같이 마음 아파하였습니다.

  11월, 저희가 읽을 책은 헤로도투스의 『역사』입니다. 혼자 읽기 버겁게 느껴지는 고전이지만 든든한 벗들과 함께 읽어나갈 생각으로 제 가을은 벌써 행복합니다. 좋은 책은 좋은 벗이 되어 우리를 안내할 것입니다. 책과 함께하는 날 되십시오.

이선애(동문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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