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는 새로운 학교에 진학하면 마음가짐을 다잡기 위해 핸드폰을 바꾸곤 한다. 작년에도 대학생이 되면서 핸드폰을 바꿨다. 핸드폰을 새로 살 때, 직원이 이전 폰에 있던 전화번호나 사진 등을 옮길지 물어본다. 예전에는 무조건 전 폰에 있는 모든 내용을 옮겨달라고 했다. 하지만 작년은 달랐다. “아무 것도 옮기지 말고 그냥 주세요.” 그러자 직원은 “인간관계 정리하나 봐요.”라고 말했다. 처음에는 그 말을 듣고 흠칫했다. 기자는 대학이라는 새로운 시작에 앞서 인간관계 정리를 원했던 것 같다.
사람들은 새로운 시작을 할 때 주변과 인간관계를 정리하고 싶어하는 경우가 있다. 가게 직원은 “설레는 얼굴이 아니라, 뭔가 할 것 같은 얼굴을 한 사람들은 다 새로운 휴대폰을 그대로 가져가세요.”라면서 말을 이어갔다. 이전 폰에는 전화번호가 150개 정도 있었다. 초중고 때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들 번호를 모두 저장해놓은 탓이다. 그렇게 한 명씩 정리하니 남은 사람이 50명뿐이었다.
지금까지 불편하지만 억지로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이 100명이나 된다는 사실에 기자는 충격 받았다. 돌이켜보면 기자는 인간관계를 게임 퀘스트같이 매일 도전했다. 그래서 같은 학교에 다니던 동성 친구들에게 친한 척을 많이 했다. 그 결과 동성 친구 중에서 대화를 나눠보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 게임에서 아이템을 엄청나게 두른 캐릭터가 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아이템이 너무 무겁거나 크면 캐릭터 체력을 고갈시킨다. 그래서 기본 캐릭터로 돌아가는 사람도 여럿 존재한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기자의 체력을 고갈시켰다. 기자는 애써 부정하면서 친하지 않은 친구들과 불편한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러다 기자는 고등학생 때 많은 학업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그 상황 속에서 기자는 부모님 보다 친구들에게 더욱 의지하였다. 어느 날 문득 들어간 통화기록에는 똑같은 번호들만 찍혀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많던 전화번호 중 막상 전화 할 사람이 없었다. 그때 주변을 정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연락처가 사라지고 난 후 남는 허전함을 마주할 용기가 부족했다. 그래서 계속해서 그 상황을 애써 못 본 척했다.
그러다 작년 새로운 시작을 계기로 대부분 정리했다. 기자는 더 이상 인간관계에 강박증을 갖지 않기로 다짐했다. 친구는 없으면 없는 데로 가까운 친구에게 더 시간을 갖고 잘해주기로 마음먹었다. 그 결과 아는 사람이 많았던 때보다 지금이 훨씬 행복하다. 사람에게 치이고 힘든 사람들은 기자처럼 전화번호부를 비워보자. 처음에는 허전할 거다. 하지만 그것은 그 사람들이 없어서 생긴 허전함이 아니라 자신을 괴롭히던 상황이 없어져 생긴 허전함 이다. 그러니 스트레스받는 인간관계가 있다면 과감히 전화번호 삭제를 눌러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