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스케줄러에 해야 할 일을 적어두는 버릇이 있다. 중요한 순서에 따라 빨간색, 파란색, 검은색으로 구분한다. 시험, 행사, 과제 제출일 등 기한을 반드시 맞춰야 하는 날은 형광펜으로 표시해 놓는다. 이런 규칙으로 적어도 스케줄러는 어느샌가 형형색색으로 변해 알아보지 못하게 된다. 별거 아닌 일도 검은색 볼펜으로 다 적었더니 네모 칸이 꽉 차 다음 일정을 적지 못했다. 그러나 사소한 일 하나하나 적어놓은 이곳에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은 어디에도 없었다.
가정의 달이라고 불리는 5월이다. 1년 중 중간쯤에 위치한 이 날은 기념일이 가득하다. 5월 5일 어린이날, 8일 어버이날, 15일 스승의 날, 18일 성년의 날, 21일 부부의 날이다. 이름만 보면 무언가 챙겨야 할 것만 같다. 실제로 5월이 되면 건강식품과 카네이션 판매량이 급증한다. 어버이날, 스승의 날 문구도 실시간 검색어 상위권에 올라간다. 감사한 마음을 드리고 존경한다는 문구를 선물에 동봉하는 마음은 5월을 닮아 따뜻하다. 올해 우리 가족은 이런 마음이 아닌 시간을 투자해 함께 하루를 보냈다.
요즘 우리 가족 구성원 전부가 바쁘다. 서로의 일을 하다 보면 모두 모이는 날은 얼마 되지 않는다. 평일에 일하고 주말에 쉬는 부모님과 평일에 쉬고 주말 알바를 하는 우리는 겹치는 시간이 없다. 앉아서 이야기를 나눈 날이 언젠지 흐릿하다. 차츰 멀어지는 거리를 느낄 때쯤 가족 구성원이 모이는 시간을 마련했다. 우리 가족은 5월에 맞이한 황금연휴 중 하루 드라이브를 했다. 계획과 목적지 없이 떠난 여정이었다. 조금 즉흥적이긴 했지만, 그만큼 신이 났다. 5명이 채운 차는 좁았지만 부대껴서 가는 맛도 쏠쏠했다.
코로나19로 차에서 내린 시간보다 타고 달린 시간이 더 많았다. 그 시간은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차가 달리는 동안 우린 많은 이야기를 나눴기 때문일까? “요즘 힘든 거 없냐.”는 물음에 나는 힘든 일을 하나둘 얘기했다. 언니와 동생도 걱정 없어 보였지만, 나름대로 고민을 하고 있었다. ‘대학 진학’ ‘휴학’ ‘인간관계’ 등을 이야기하며 차 안은 이야기의 장이 되었다. 부모님은 ‘서비스직 고충’을 말했다. 이야기를 들으니 내 고민은 작은 축에 속했다. 서로에게 격려의 말 대신 신나는 노래를 틀며 응원했다. 가볍지만 충분히 힘이 되었길 바랄 뿐이다.
모두가 가정의 달에 큰 의의를 두지 않았다. 나도 마찬가지다. 각자도생이 급한 지금, 함께 보내는 시간은 사치라고 생각했다. 솔직히 조금 여유로울 때 가족을 챙겨도 된다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그 시간만큼 벽이 생기고 어색해지기 마련이다. 우리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숨 막히지만, 멈출 수 없는 사회를 사는 중이다.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리니 조금 쉬어가고 싶은 때가 생겼다. 좌우를 살피니 나처럼 달리는 사람들뿐이다. 마음이 급해져 쉬는 것을 포기할 때가 많다. 이젠 가정의 달을 핑계 삼아 재충전을 해볼 때이다. 강한 마침표를 찍기 위해 여유를 주는 쉼표는 필요한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