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과 ‘연시’는 사람이 만든 ‘시간개념’입니다. 무한하게 흘러가는 우주의 시간에는 그런 마디가 없습니다. 유한한 사람의 시간이 시간에 그런 마킹(marking)을 해놓은 것입니다. 사람은 마킹된 시간의 무대, 제 자리에 서서 환호하는 것입니다.
무릇 이런저런 기념일이라는 것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시간은 강물처럼 여흘여흘 흘러가고, 사람은 인생의 배를 타고 ‘각주구검(刻舟求劍)’을 새기는 일입니다. 어리석은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한 해를 보내고 또 한 해를 맞이하는 일에 해마다 환호하는 일에 저는 싫증이 난 지 오래입니다. 제가 쓴 시간이 얼마이며, 제가 쓸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헤아려보고 자성하는 것이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것이 유익한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이 답은 도덕적인 ‘폼’이 아니라 인생의 시간을 아프게 지나온 사람의 ‘각성’입니다. 해 뜨는 것을 찾아 줄을 서서 가는 생각 없는 나그네보다 자신의 과거와 미래를 내다보는 사유의 순례자가 되길 권하는 것입니다.
12월 31일의 해와 1월 1일의 해는 일출 시간에 조금 차이가 있을 뿐 그 해가 그 해입니다. 지구가 해를 찾아가는 길을 황도(黃道)라고 합니다. 그 황도를 따라 백지 위에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또박또박 새겨보길 권합니다. 그것이 새해에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일 것입니다.
프랑스 인상파 화가인 폴 고갱(1848~1903)은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는 ‘질문’이 담긴 작품을 남겼습니다. 그는 이미 사람이 시간을 따라가는 끝이 어디인지 다 알고 스스로 질문하고 스스로 답했습니다. 시간이 무한하다고 믿는 사람만이 어리석어 그 종착역을 알지 못할 뿐입니다.
불가의 화두에 ‘방하착(放下着)’이라고 있습니다. ‘마음속에 한 생각도 지니지 말고 허공처럼 유지하라’는 말입니다. 쉽게 말하면 ‘다 내려놓아라!’는 말입니다. 내려놓으면 편안한 길을 악착같이 다 지고 가는 사람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생각도 짐입니다. 언제나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듭니다.
그 반대말이 ‘착득거(着得去)’입니다. ‘방하착’을 설한 조주 스님 왈, 내려놓을 것이 없으면 어쩌냐는 대중의 질문에 ‘다시 지고 가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내려놓기가 그만큼 힘들다는 것의 방증일 것입니다. 절집에서 ‘방하착’만 해도 ‘반 부처’라고 했습니다. 저는 새해에는 내려놓는 일에서 즐거움을 얻을까 합니다. 우리 모두 무얼 그렇게 지고 가려는지 다 내려 봅시다.
책상서랍부터 비우고, 책꽂이를 비우고, 주머니를 비우고, 지갑을 비우고, 욕심을 비운다면 경자년 새해가 얼마가 가볍겠습니까. 마음을 비우고 자신마저 비울 때 찾아오는 열락(悅樂)을 저는 깨달음이라 생각합니다. 새해 아침에 당신에게 묻습니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그럼 어디로 가는 중입니까?
시인·석좌교수